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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결로 넘실대는 하늘공원 억새밭,
사람이 나고 자라듯, 마을과 지형도 생장한다. 서울의 역사기록을 보면, 지금 우리가 보는 한강의 모습과 1970년대 이전 한강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한강 개발사업으로 섬이었던 곳이 육지가 되기도 했고, 새로운 섬이 생겨나기도 했다. 개발로 사라졌던 섬이지만 퇴적층이 쌓이며 다시 생겨난 경우도 있다. 잠실도와 난지도는 사실상 육지가 됐고 저자도는 사라졌으며, 사라졌던 밤섬은 퇴적물이 쌓이면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 중 금성평사. 간송미술관
그런 점에서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그림들은 무척 흥미롭다.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조선시대 한강과 한양의 풍경을 이 그림들 덕분에 어렴풋하게라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481-72번지.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그림 중 ‘금성평사’(錦城平沙)에서 이 주소지의 과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난지도(蘭芝島)라 불렸던 곳, 바로 지금의 월드컵공원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난지도는 뒤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졌고 앞으로는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이름처럼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가 날 것만 같은 그림이다. 조선시대 난지도는 꽃향기, 풀향기가 나는 섬이라 하여 ‘꽃섬’으로 불렸고,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땅콩과 수수를 재배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의 성장과 함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꽃향기 대신 악취로 뒤덮였던 시기.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은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했다. 나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운명의 이끌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 이름 현정(賢靜)은 어질 ‘현’에 고요할 ‘정’자를 쓴다. 나의 외조모께서 기가 센 손녀딸의 생시(生時)를 누르기 위해 작명가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제일 조용하고 약한 이름으로 지은 거라 들었다. 자라면서 두고두고 원망했던 일이다. 기왕 세게 태어난 김에 이름도 거창하게 지어줬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탓했다. 난지도 역시 잠시 이름의 운명을 벗어난 듯 보였지만 결국 제 이름대로 꽃향기를 회복하게 됐으니, 무엇으로 불리느냐는 역시 중요한 일인가보다.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던 기간 형성된 두 개의 쓰레기 산 중 하나는 하늘공원이 됐고, 하나는 노을공원이 됐다. 한 10년쯤 됐으려나? 식목일을 기해 남편 회사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주최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도 참여해 비탈진 경사면에 사철나무와 산벚나무 묘목을 여남은 그루 심었다. 거기가 노을공원이었는지 하늘공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울창해진 숲을 볼 때마다 이 숲을 마치 내가 만든 양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가을의 난지도는 은빛 물결 넘실대는 억새밭이 절정이다. 억새는 ‘억센 새풀’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새풀이란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을 통칭하는 이름인데, 이들 중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제일 큰 차이는 서식지. 갈대와 억새는 사는 곳이 다르다. 갈대는 물이 있어야 살고, 억새는 물이 없는 곳에 산다. 생김새도 다른데, 갈대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라면 억새는 가지런히 빗은 백발의 모습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갈대든 억새든 다를 바 없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느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느니. 이런 말이 설마 갈대에만 해당할까. 갈대든 억새든 비록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들은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보기엔 한낱 가늘고 여린 풀포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영웅 설화 ‘아기 장수 우투리’에는 그 무엇으로도 잘리지 않던 탯줄을 억새풀로 끊어냈다는 대목도 나오지 않는가. 결대로 쓸어올리면 부드럽지만, 거꾸로 쓸어내리면 손을 베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침에 보느냐 저녁에 보느냐 빛의 각도에 따라 색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하늘공원 억새밭. 축제는 막을 내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하늘공원에서 억새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한 달은 족히 더 남았기 때문이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하지만 이곳은 서울의 성장과 함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꽃향기 대신 악취로 뒤덮였던 시기.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은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했다. 나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운명의 이끌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 이름 현정(賢靜)은 어질 ‘현’에 고요할 ‘정’자를 쓴다. 나의 외조모께서 기가 센 손녀딸의 생시(生時)를 누르기 위해 작명가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제일 조용하고 약한 이름으로 지은 거라 들었다. 자라면서 두고두고 원망했던 일이다. 기왕 세게 태어난 김에 이름도 거창하게 지어줬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탓했다. 난지도 역시 잠시 이름의 운명을 벗어난 듯 보였지만 결국 제 이름대로 꽃향기를 회복하게 됐으니, 무엇으로 불리느냐는 역시 중요한 일인가보다.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던 기간 형성된 두 개의 쓰레기 산 중 하나는 하늘공원이 됐고, 하나는 노을공원이 됐다. 한 10년쯤 됐으려나? 식목일을 기해 남편 회사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주최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도 참여해 비탈진 경사면에 사철나무와 산벚나무 묘목을 여남은 그루 심었다. 거기가 노을공원이었는지 하늘공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울창해진 숲을 볼 때마다 이 숲을 마치 내가 만든 양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가을의 난지도는 은빛 물결 넘실대는 억새밭이 절정이다. 억새는 ‘억센 새풀’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새풀이란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을 통칭하는 이름인데, 이들 중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제일 큰 차이는 서식지. 갈대와 억새는 사는 곳이 다르다. 갈대는 물이 있어야 살고, 억새는 물이 없는 곳에 산다. 생김새도 다른데, 갈대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라면 억새는 가지런히 빗은 백발의 모습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갈대든 억새든 다를 바 없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느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느니. 이런 말이 설마 갈대에만 해당할까. 갈대든 억새든 비록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들은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보기엔 한낱 가늘고 여린 풀포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영웅 설화 ‘아기 장수 우투리’에는 그 무엇으로도 잘리지 않던 탯줄을 억새풀로 끊어냈다는 대목도 나오지 않는가. 결대로 쓸어올리면 부드럽지만, 거꾸로 쓸어내리면 손을 베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침에 보느냐 저녁에 보느냐 빛의 각도에 따라 색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하늘공원 억새밭. 축제는 막을 내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하늘공원에서 억새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한 달은 족히 더 남았기 때문이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