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은빛 물결 넘실대는 난지도의 가을
서울, 이곳 l 마포구 월드컵공원
등록 : 2025-10-30 16:59
은빛 물결로 넘실대는 하늘공원 억새밭,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 중 금성평사. 간송미술관
하지만 이곳은 서울의 성장과 함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꽃향기 대신 악취로 뒤덮였던 시기.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은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했다. 나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운명의 이끌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 이름 현정(賢靜)은 어질 ‘현’에 고요할 ‘정’자를 쓴다. 나의 외조모께서 기가 센 손녀딸의 생시(生時)를 누르기 위해 작명가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제일 조용하고 약한 이름으로 지은 거라 들었다. 자라면서 두고두고 원망했던 일이다. 기왕 세게 태어난 김에 이름도 거창하게 지어줬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탓했다. 난지도 역시 잠시 이름의 운명을 벗어난 듯 보였지만 결국 제 이름대로 꽃향기를 회복하게 됐으니, 무엇으로 불리느냐는 역시 중요한 일인가보다.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던 기간 형성된 두 개의 쓰레기 산 중 하나는 하늘공원이 됐고, 하나는 노을공원이 됐다. 한 10년쯤 됐으려나? 식목일을 기해 남편 회사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주최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도 참여해 비탈진 경사면에 사철나무와 산벚나무 묘목을 여남은 그루 심었다. 거기가 노을공원이었는지 하늘공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울창해진 숲을 볼 때마다 이 숲을 마치 내가 만든 양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가을의 난지도는 은빛 물결 넘실대는 억새밭이 절정이다. 억새는 ‘억센 새풀’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새풀이란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을 통칭하는 이름인데, 이들 중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제일 큰 차이는 서식지. 갈대와 억새는 사는 곳이 다르다. 갈대는 물이 있어야 살고, 억새는 물이 없는 곳에 산다. 생김새도 다른데, 갈대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라면 억새는 가지런히 빗은 백발의 모습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갈대든 억새든 다를 바 없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느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느니. 이런 말이 설마 갈대에만 해당할까. 갈대든 억새든 비록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들은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보기엔 한낱 가늘고 여린 풀포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영웅 설화 ‘아기 장수 우투리’에는 그 무엇으로도 잘리지 않던 탯줄을 억새풀로 끊어냈다는 대목도 나오지 않는가. 결대로 쓸어올리면 부드럽지만, 거꾸로 쓸어내리면 손을 베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침에 보느냐 저녁에 보느냐 빛의 각도에 따라 색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는 하늘공원 억새밭. 축제는 막을 내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하늘공원에서 억새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한 달은 족히 더 남았기 때문이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