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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몸을 던지고
군교가 ‘여기서 죽었단 말이요’라고
울부짖었다는 전설에서 유래
<만기요람> 등에 ‘여기소’ 이름 등장
근거 없는 이야기로 단정하기 어려워
한양도성이나 북한산성에는
심금 울리는 스토리텔링이 부족해 김별아의 <도시를 걷는 시간>서 언급
심금 울리는 스토리텔링이 부족해 김별아의 <도시를 걷는 시간>서 언급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조에 동원된 연인을 찾아왔다가 목숨을 끊은 여인의 순애보에서 연유한 여기소 연못 터에 경로당을 알리는 입석이 서 있다. 여기소 터 푯돌이 왼쪽에 보인다.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302의3 여기소(汝其沼)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여기소라고? 그게 뭐야?” 하겠지만 실존 장소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아파트 숲을 빠져나와 북한산성 쪽으로 20여 분 달리면 북한산국립공원이 펼쳐진다. 아파트 대신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 거대한 기를 내뿜는 화강암 덩어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
백화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오던 길로 조금 내려가면 백화사 입구 안내표지가 나타난다. 큰길 건너편은 북한산 옹기집이다. 미니마트 앞에서 좌회전해 북한산 둘레길 효자동 방면으로 올라가다가 북한산 낚시터 가는 길로 접어들기 전에 걸음을 멈춰야 한다. 계속 직진하면 백화사를 지나 의상봉 등산길과 내시 묘를 만날 수 있다.
앞을 가로막는 제법 큼직한 2층 건물의 도로명 주소는 의상봉길 8길. 대한노인회 은평구지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여기소 경로당’이라고 새겨진 입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로당 큰 돌 아래 여기소 터 푯돌이 들풀처럼 누워 있다. 상식선에서 짐작이 가지 않는 이름을 가진 경로당 앞에는 정자가 놓인 마당이 있고, 정자 뒤편에서는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무심코 북한산 둘레길을 지나가다 여기소 경로당이라는 재미난 이름에 끌린 등산객이 푯돌 문구에 한눈을 팔지도 모른다.
푯돌에는 ‘여기소 터(汝其沼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곧 여기소라 하였다고 전해온다.’고 적혀 있다. 무려 넉 줄짜리 안내문이다. 보통 두 줄을 넘지 않는 ‘거두절미’ 푯돌보다 두 배 이상 친절하다. 무엇보다 여기소라는 이상야릇한 지명을 ‘너의 그 사랑이 잠긴 못’이라고 문학적으로 풀었다. 경로당 건물과 마당이 예전에는 사람이 몸을 던질 만큼 큰 연못이었나보다.
대개 조선시대 푯돌은 관청이나 인물, 건물, 사건 같은 거창한 역사적 사실에 얽힌 내력을 표시하는데, 여기소 터 푯돌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생몰 연대도, 이름이나 직책도, 지명이나 근거도 무시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조에 동원된 연인을 향한 기생의 목숨을 건 순애보가 전부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을 푯돌 대상으로 삼은 점이 특이하다.
푯돌의 남발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판석형 푯돌의 기단에는 일련번호, 건립 연월일, 건립 주체가 기재돼 있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짝퉁’인 듯도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2017년 1월 현재 푯돌 현황을 확인해봤더니 ‘진짜’였다. 2008년에 설치된 서울 시내 전체 푯돌 323개 중 하나였다. 아마 정비 과정에서 설치 업체의 실수로 중요 적시 사항을 빼먹은 듯하다.
진관동 내시 묘역에 있는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물침비. 하사한 땅의 소나무 벌목과 침범을 금지한다는 비석이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다.
늘 그렇듯이 푯돌의 내용이 문제다. <은평구지>에 실린 ‘그대 여기서 죽었구려! : 여기소’ 편에 따르면 남자 주인공은 ‘관리’가 아니라 조선 19대 숙종 37(1711)년 4월에 북한산성 축조에 파견된 ‘군교’(하사관)였다. 비운의 여주인공이 기생인지도 아리송하다. 구지에 실린 것처럼 “시골에서 남편을 만나려고 먼 길을 왔습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가게 해주세요”라고 하소연했다면 여지없이 부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흥미를 더하고자 기생이라고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입으로 전해졌고, 복수의 책에 거론됐으며, 장소의 근거가 있는 설화 혹은 민담을 ‘전설’이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이다. 두 번이나 천릿길을 걸어서 찾아왔건만 “나라의 큰 공사에 남녀가 만나면 부정 탄다”며 만나지 못하게 하자 망연자실해서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얘기와 여주인공이 죽은 지 보름 뒤 공사를 마친 군교가 연못에 와서 “여기서 죽었단 말이요? 여기서!”라고 울부짖는 소리에서 여기소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은 사뭇 그럴싸하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명소 기념사진집>에 북한산성 행궁의 위용이 담겼다. 1915년 홍수로 떠내려가기 전으로 추정된다.
북한산성은 백성을 부역으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군사가 쌓았다. 공사 기간은 6개월 만에 끝났다. 북한산성의 넓이는 한양도성보다 3배 이상 넓다. 유사시 왕이 머물 수 있도록 124칸의 행궁을 짓고, 2만6천 섬의 군량미를 확보하고, 저수지 26개와 우물 99개를 파 식수를 확보했다. 북한산성은 인수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나한봉~용혈봉~의상봉~원효봉~영취봉 봉우리를 이었다. 이중환은 1751년에 펴낸 <택리지>에서 “북한산성은 동쪽이 너무 낮아서 만약에 적이 강을 막아 그 물을 산성에 댄다면 성안 백성은 물고기 신세라는 말이 있어서 산성 축조 논의가 중지됐다”고 적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북한산성은 한양도성의 북쪽 외곽 방어선으로 축조했으나 단 한 번도 서울을 지키지 못한 채 1915년 대홍수 때 행궁과 성곽 대부분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북한산성 축조 과정에서 벌어진 보기 드문 ‘러브 어페어’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스토리는 남았다. 우리 역사는 너무 딱딱하다. 개인적으로 동화책에서 읽고 영화에서 본 라인강 변 로렐라이의 전설을 찾아갔을 때, 코펜하겐에서 인어상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우리도 전설이나 설화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개발하고, 보급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산성에서 가장 내밀한 장소 중 하나인 산영루가 2014년 복원되기 전 사진이다. 산영루는 숙종이 북한산성을 쌓기 전부터 있었으며 산성을 쌓은 뒤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앞으로 한양도성이나 북한산성이 남한산성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려면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한양도성이나 북한산성에는 심금을 울리는 사람 이야기가 없다. 자연을 이용한 과학적 조영 원리와 역사성은 인정하지만 2% 부족하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지은 뒤 이를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세우면서 동원된 수많은 부역 인력에 관련된 스토리를 들어본 적 없다. 어림잡아 팔도에서 60만 명 이상이 도성과 산성을 짓는 데 동원됐다. 관리와 운영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축조 과정에서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인부들이 어떻게 숙식을 해결하며 살았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가족이나 연인과 떨어진 사람들의 생활상은 더욱 궁금하다.
근거 없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1808년 순조 때 편찬된 재정과 군정에 관한 왕의 참고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축성에 동원된 군사나 장정을 상대로 술이나 음식을 팔던 술집으로 추정되는 ‘여기소’(女妓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또 성능 스님이 1745년 영조 대에 편찬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여기연(汝其淵)으로부터 지장리(紙匠里) 마분(말무덤)까지 표를 세우고 어영청에 소속시켰다”라며 여기소를 ‘여기연’으로 기록했다. <북한지>가 북한산성 축조에 정통한 기록이고 보면 여기소는 역사적 장소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비 오는 가을밤이면 “여보, 여기소!”라는 비명이 들렸다고 한다. 연못은 메워져 여기소 경로당이 들어섰고, 연못의 이름이 한때 ‘예기수’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소설가 김별아는 <도시를 걷는 시간>에서 “너의 그 사랑이 잠긴 못, 그래서 여기소다. 간절하고 안타깝고 슬픈 사랑이 절망으로 묻힌 자리다”라고 묘사했다. 이만하면 북한산성의 대표적 스토리텔링 감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l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