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조선 최대 규모 관아…갖가지 경조사 빠짐없이 ‘출연’

중구 을지로2가 장악원 上

등록 : 2019-06-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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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주·노래·춤 등 음률 총괄

유교 기본 이념인 예악사상 중

악의 이념을 구현하는 기관

국립국악원으로 보는 건 위상 격하

1년 10번 큰 제사에서 제례악 연주

1141명 구성원, 한성부의 8배 인원

관아 크기도 전체 중 으뜸

‘흥청망청’은 장악원에서 유래


조선 시대 연주와 노래, 춤 등 음악을 총괄한 장악원 옛터가 있던 을지로2가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흥미롭게도 미술을 담당한 도화서 옛터와 큰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조선 시대 연주와 노래, 춤을 포함한 모든 음률을 총괄한 장악원(掌樂院) 옛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혹자는 장악원을 오늘의 국립국악원 격이라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위상 격하다. 장악원은 유교의 기본 이념인 예악(禮樂)사상 중 ‘악’(樂)의 이념을 구현하는 기관이다. 인간은 ‘예’(禮)로서 질서를 확립한 뒤 쾌락을 느끼게 되는데, 이 즐거움이 소리로 표출된 것이 바로 악이기 때문이다. 이를 오늘의 국악이라는 작은 그릇에 담기란 불가능하다.

예술의 양 기둥인 음악과 미술 중 음악 관련 모든 분야를 다룬 기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침 장악원 옛터는 조선 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도맡은 도화서 옛터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도화서 터 푯돌은 을지로입구역 3번과 4번 출구 사이에 있다. 조선 시대 음악과 미술의 두 산실이 광통교 일대를 최고의 번화가로 꽃피웠다.

장악원 푯돌은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181 하나금융그룹 명동 사옥(옛 외환은행 본점) 화단에 고이 모셔져 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에서 코앞이다. 대부분의 푯돌이 구석에 처박혀 찬밥 신세인 데 비하면 대접을 받는 모양새다. 푯돌과 관련 최근 놀라운 일이 있었다. 4·19혁명기념사업회가 2010년에 세운 ‘4·19혁명의 중심’이라는 푯돌이 서울시의회 앞 세종대로 보행로에 정면으로 옮겨진 것이다. 푯돌의 전면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보도 정면을 향해 세워진 첫 사례이다. 서울시의 푯돌 세우기 원칙이 바뀐 것인지, 이 푯돌이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보행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보도 가장자리에 숨기듯이 설치하는 것보다 백번 천번 낫다.

장악원 터를 알리는 푯돌에는 ‘음악의 편찬 교육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 자리’라는 예의 거두절미 방식의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설명문을 읽고 장악원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장악원이 행했던 기능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특히 장악원의 핵심 업무를 악보 편찬이나 음악 교육으로 잘못 알리고 있다. 장악원을 예조 산하의 음악 교육 행정기관으로 본 탓이다. 장악원을 당상관 제조 2명, 당하관 정3품 정 1명, 종4품 첨정 1명, 종6품 주부 1명, 종7품 직장 1명으로 이뤄진 단순한 문관 조직으로 파악한 것이다.

장악원의 실체는 정6품 전악(典樂) 아래 악사와 악생, 악공, 기녀로 이뤄진 전문가 집단이다. 전악은 오늘의 음악감독이자 조직의 실제 리더였다. 2015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대표와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의 밥그릇 다툼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봉건 왕조를 유지하는 각종 의례(儀禮)에서 곡을 연주하고 공연하는 일이 장악원의 주 임무였다. 왕실의 행사나 왕의 행차가 있는 곳에 장악원의 음악 전문가들이 동원돼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 1986년에 설치한 구닥다리 푯돌 설명은 시대 흐름에 맞도록 ‘친절하게’ 수정했으면 한다.

궁중 잔치에서 춤을 추는 여령(여자 기생)을 그린 신축진찬도.

장악원이 맡은 가장 중요한 연주와 공연은 무엇일까. 크고 작은 제사와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연향(진연), 가례, 군사 의례, 잔치가 있다. 제사는 종묘제례와 사직제가 큰 제사에 속한다. 연중 종묘제향이 최소 다섯 차례, 영녕전 제사 두 차례 등 적어도 일곱 번 지냈다. 사직제 세 차례를 합치면 일 년에 열 번의 큰 제사에 참가해 제례악을 연주해야 했다. 풍운뇌우제, 선농제, 선잠제, 문묘제 등 중간 규모의 제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밖에 정월 초하룻날과 동짓날 가례는 물론 외국 사신 잔치 등 갖가지 경조사 행사에도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처럼 왕실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와 연회, 행사, 잔치에서 악기 연주와 춤, 노래를 도맡다보니 장악원 구성원 수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보면 아악 악사 2명, 악생 297명(후보생 100명), 속악 악사 2명, 악공 518명(10인당 후보생 1명), 가동 10명으로 규정돼 있다. 이를 합치면 829명이며 후보생을 포함하면 981명이다. 이 밖에 지방에서 선발돼 서울에 온 기생인 선상기(또는 경기) 150명을 더하면 무려 1141명이 장악원 구성원이었다. <경국대전> 직제에서 도화서 인원이 50명에 못 미치고, 가장 큰 관아인 한성부(서울특별시)의 근무 인원이 130명인 것과 비교하면 조선 최고, 최대 규모의 기관이라고 할 만하다.

구성원이 많다보니 관아 규모도 컸다. 조선 후기 서울의 인문지리역사서 <한경지략>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에 따르면 장악원 자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몹시 터가 세고 불길한 곳이기 때문에 음악 관련 기관을 두고 풍악을 울려 억센 기세를 누르려고 했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지명사전>에 장악원은 처음에는 서부 여경방(무교동·서린동 일대)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선조 때 한성부 남부 명례방으로 옮겨왔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중구 명동1가와 을지로2가에 해당한다. 명동이라는 동명은 명례방에서 유래했다.

세조 때 장악원 관아는 매우 거대해서 장안의 모든 관아 중 으뜸가는 규모였다. 장안의 벼슬아치들에게 궁궐과 종묘사직, 문묘에서 거행되는 행사의 의례를 익히게 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때로 과거시험장으로도 쓰일 정도였다. 유흥에 심취한 연산군은 궁중 음악을 관장하던 장악원 배속 인원을 갑절로 늘리는 한편 춤추는 기녀의 수도 150명에서 300명으로 늘리고 관아를 원각사(탑골공원)로 이전한 뒤 연방원(聯芳院)이라고 기관명을 개칭했다. 전국에서 재색 있는 여성 수천 명을 선발하여 흥청, 가흥청, 계평, 운평 등으로 등급을 매기고 이들 여악(女樂·궁중에서 악기를 타고 노래 부르며 춤추던 기생)을 위한 기관으로 취홍원, 뇌영원, 함방원, 채하각 등을 설치했다. 지금 우리가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모양’을 지칭하는 ‘흥청망청’이라는 용어가 바로 이때 장악원에서 생겼다.

장악원과 장악원 터의 유전은 계속된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으로 내쫓겼던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일본거류민단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일본군 1개 대대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서 장악원의 악공을 내보내고 멋대로 주둔하면서 장악원은 갈 곳을 잃고 허둥대다가 결국 갑오개혁 때 폐지됐다.

이후 1908년 일제강점기 경제 수탈의 대명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부가 설립되면서 1911년 르네상스풍 목조 2층 건물이 들어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든 기구다.

일제강점기 장악원 터에 경제 수탈의 대명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건립됐다. 나석주 열사의 폭탄 투척 현장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하나금융 건물 옆에는 1999년에 건립된 의열단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서 있다. 1926년 폭탄 투척 사건의 동선을 따라가보면 당시의 상황이 손에 잡힌다. 열사는 현재의 명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조선식산은행 대부계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바로 큰길을 건너서 동척에 또 폭탄을 던졌으나 두 발 모두 불발에 그치자 동척 바로 옆 건물인 조선철도회사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 경찰 등 7명을 살상한 뒤 마지막 1발로 자결했다.

1945년 해방 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의 주인은 신한공사, 중앙토지행정처, 농림부 특수토지행정처 등으로 계속 바뀌다가 한국전쟁 이후 내무부 청사로 임시 사용됐다. 1970년 외환은행이 사들여 1972년에 철거한 뒤 1981년 지금의 건물을 신축했다. 은행 건물 뒤편엔 조선말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있었다. 재동에 있던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넓은 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온 곳이다.

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 김범우의 집터로도 추정된다. 역관 집안 출신 김범우는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 교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해, 명례방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했다가 1785년 적발돼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과 함께 형조로 끌려가 유배 끝에 사망했다. 장악원 옛터 앞쪽이 김범우의 집터로 추정된다. 500년 넘게 영혼이 자유로운 예술가와 종교인의 땅에 일시적으로 식민지배기구와 금융기관이 들어섰지만 그 지층에는 예술혼이 꿈틀거린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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