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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
어렸을 때 집에 책이 많았다. 주로 전집이었다. 한 질이 보통 30권 내지 50권으로 구성됐는데, 새 전집이 들어오기까지 거의 모든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곤 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종류는 위인전이다. 교훈보다는 한 사람의 일대기로서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위인전은 실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겪어낸 개인의 질곡이 그 어떤 소설보다 좋았다.
갑자기 어린 시절 읽던 위인전이 생각난 이유는 내가 이번에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위인전집이다.
만해 한용운, 태허 유상규 묘지처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우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이중섭, 권진규 같은 미술가, 김영랑, 박인환 등 시인, 가수 차중락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타자 이영민 같은 문화예술인의 묘지가 이곳에 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특히 이곳에 영면하신 분들을 뵈며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이 공동묘지로 기능한 시기가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고,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그걸 다시 복구해낸 피와 눈물로 얼룩진 시기. 어떻게 그 많은 일이 이 짧은 시기 안에 다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했던 우리의 조부모,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엔 수국이 한창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중랑구의 끝자락, 구리시로 진입하기 직전에 있다. 야트막한 망우산 자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조성했는데, 둘레길 양쪽으로 여러 개의 샛길을 통해 이곳에 영면하고 계신 역사 속 인물들의 묘소로 들어갈 수 있다. 부지가 넓어 하루에 다 방문하긴 어렵고 총 4개 코스로 나뉘어 있으니 계획을 세워 한 곳씩 방문하며 이분들의 생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번에 내가 참배하며 특히 마음이 아렸던 곳은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역’, 유관순 열사의 유골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이태원 무연분묘 합장묘역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사망 직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됐다. 문제는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택지로 개발하면서 그곳에 있던 시신을 망우리로 이장하게 했는데, 이때 소식이 닿지 않은 무연분묘 2만8천여 기를 한꺼번에 화장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했다는 것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3·1운동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무연분묘로 처리됐을 거란 추정이다. 작은 봉분 아래 2만8천분의 1에 해당하는 한 줌 흙으로 남았을 어린 소녀의 일생을 생각하니 시대와 역사가 그리 야속할 수 없다.
앞서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위인전집에 비유했지만 실은 이곳에 위인들의 묘소만 있는 건 아니다. 친일파,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들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무엇이 저 어린 소녀의 생을 이토록 잔인하게 짓밟아버린 걸까. 나라의 온전한 존립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는다. 한 분 한 분의 묘비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망연도에서 출생연도를 뺄셈해봤는데, 정말 몇 분을 제외하고는 다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는지. 곤궁하고 고달팠을 그들의 삶을 생각하며 깊은 연민을 느꼈다.
중랑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랑전망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공연히 무덤을 무서워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덤이 마냥 무서워할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무덤에 오면 죽음이 아니라 삶을 생각하게 된다. 촘촘히 돌아가는 삶의 루틴에 매몰돼 있을 땐 생각할 틈이 없지만, 느린 걸음으로 이곳에 잠든 분들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 2025년의 남은 절반을 구상해본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