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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보다 아빠”…부자유친 야구단의 송년회

구로구 ‘천하무적부자야구단’ 창단 7년째 부자간 사이 돈독

등록 : 2016-12-22 15:19 수정 : 2016-12-2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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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부대끼며 쌓은 정은 탄탄하고 오래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는 구로구 천하무적부자야구단 선수들이 지난달 26일 유한공고 운동장에서 올해 마지막 훈련을 마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지난달 26일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잔뜩 흐린 하늘, 구로구 항동에 자리 잡은 유한공고 운동장. 토요일 아침부터 야구글러브를 챙겨 든 남자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이들 뒤로는 함께 온 아빠들이 차가운 날씨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으, 추워! 날씨가 풀린다고 하더니 더 춥네.”

“얘들아, 몸이라도 풀고 벗어야지!”

아빠의 만류에도 아이들은 거추장스러운 듯 서둘러 점퍼를 벗어던졌다. 몸이 가벼워진 아이들은 어느새 남색 유니폼 차림의 날쌘 야구선수로 변신했다. 운동장을 돌며 가벼운 몸풀기에 나선 아이들 가슴에는 ‘천하무적’이란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추위에도, 야구에도 천하무적을 뽐내는 이들은 ‘천하무적부자야구단’의 소속 선수들이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아들 뒤에서 묵묵히 보폭을 맞추며 뛰고 있는 아빠들도 같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들이다.

2010년 창단한 ‘천하무적부자야구단’(이하 ‘천부야’)은 구로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스포츠를 통해 부자간 돈독한 정을 나눌 수 있도록 만든 서울시 최초의 부자야구단이다. 아빠와 아이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창단 7년 만에 대표적 아빠 돌봄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지난 9일에는 ‘2016년 건강가정지원센터 우수사업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천부야’의 입단 대상은 구로구에 사는 초등학생 아들을 둔 아빠들로, 올해 등록된 선수만 해도 29가족 58명에 이른다. 이들은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을 정기 훈련일로 정해두고 전문 코치의 지도 아래 기초 훈련 등을 한다. 몇몇은 팀 훈련이 없는 주말에도 모여 자체 연습으로 각자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한다. <서울&>이 찾은 날은 올 한 해 ‘천부야’ 활동을 매듭짓는 마지막 정기 훈련 날이었다.

운동장 세 바퀴를 목표로 뛰기 시작한 선수들이 한 바퀴를 막 돌았을 무렵, 후미에서 뒷짐 진 채 뛰던 한 선수가 대열을 빠져나왔다. 입단 4년 차 유선훈씨였다. 유씨는 “새벽 늦게까지 무리를 했더니 뛰기 힘들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들 녀석이 야구 연습에 빠지면 토라져서, 나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온다”며 아침잠 대신 훈련을 택한 이유를 말했다.

‘천부야’의 운영을 맡은 구로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이범수 씨는 “부자야구단은 엄마에게 쉴 시간을 주고 아이와 아빠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아빠와 야구를 하며 쌓은 추억들은 훗날 아이에게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운동할 시간이 많지 않은 아빠들도 같이 나와 뛸 수 있으니 엄마와 아빠, 아이까지 1석 3조의 효과”라며 야구단의 취지를 설명했다.


일분일초라도 더 이불 속에서 쉬고 싶은 토요일 아침, 아빠들이 엄마와 아이들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나온 것은 아닐까. 6년째 ‘천부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서장원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시간에 집에 있으면 나는 텔레비전만 보며 빈둥거리고, 아이는 아이대로 게임을 하며 각자 보내게 되는데, 여기에 오면 함께할 수 있으니 좋다. 그런 즐거움 덕에 강동구로 이사 간 지금도 토요일만 되면 야구 연습하러 구로까지 오게 된다.”

‘펑고 훈련’(수비 연습)에 이어 연습 경기까지 두 시간 정도의 훈련을 마칠 무렵, 잿빛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서울 지역에 내린 첫눈이었다. 내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채종서 군에게는 이날 훈련이 마지막 훈련이었다. ‘천부야’의 선수층이 초등학생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감을 묻자 종서 군은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아쉽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빠 채정기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천부야’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이다. 처음에는 내 성격이 급해서 아이에게 화도 많이 냈는데, 함께 연습하며 아이와 좋은 추억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여긴다”며 그간의 소회를 전했다.

부자가 함께 몸을 부대끼는 동안 아빠도 아이도 성장해간다. ‘천부야’의 단장을 맡은 박춘씨는 아들 정우 군에 대해 ‘공도 잘 던졌지만 헬멧도 잘 던지던 아이’라고 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못 놀아줄 때는 서로 마음 터놓기도 쉽지 않았다. 야구단을 시작한 뒤로는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 대화도 많아져 아이의 마음을 바로바로 풀어줄 수 있다. 이제 정우는 ‘공만 잘 던지는 아이’가 되었다”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정우 역시 아빠와 함께하는 ‘천부야’가 즐겁다고 한다. 올해 중1인 정우 군이 동생들 코치를 자임하며 ‘천부야’ 활동을 이어가는 것도 다른 유소년 야구단에 없는 ‘아빠’의 존재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빠와 경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내년에도 계속하고 싶어요”라는 정우 군의 바람에는 ‘야구보다 아빠가 우선’이라는 깊은 속내가 깔려 있다.

“‘천부야’ 입단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요. 저는 접수 시간 10분 전에 알람 맞춰놓고 겨우 들어왔잖아요.” “우리 아들은 1순위가 이 야구단이에요. 덕분에 올해는 캠핑도 못 갔다니까.(웃음)” 남자 셋이 만나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던가. 축구 대신 야구에 얽힌 추억담을 하나둘 풀어놓는 ‘천하무적’ 아빠들의 수다가 내리는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갔다.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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