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숲길 걷기

서울 꽃과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백두산 꽃들

김지석의 숲길 걷기 ① 백두산의 봄 풀꽃

등록 : 2024-05-23 17:15 수정 : 2024-05-2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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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풀꽃들 한 달 시차 뒤 자태 뽐내고

제비꽃·바람꽃, 국내 없는 품종도 눈길

국내 멸종 위기 백작약도 곳곳에 피어

“꽃들, 북한 거쳐서 한반도 생태 이어가

<한겨레> 창간 기자로 활동하다 2019년 정년퇴임 뒤 꽃과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김지석 나무의사가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격주 연재. 편집자

홀아비바람꽃

백두산 식생을 살펴보려고 지난 5월10~15일 중국 연변(옌볜)조선족자치주를 찾았다. 5년 만의 방문인데, 이전에 비해 뭔가 다르다. 출국 직전 중국 쪽의 군사훈련을 이유로 여객기 도착시각이 갑자기 50분 늦춰진다. 착륙 때는 사진 촬영을 막는다며 모든 창문을 꼭꼭 닫으란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백두산 부근 멋진 풍광이 차단됐다. 삐걱거리는 한-중 관계 탓이다. 현지 조선족은 남북관계와 한-중 관계가 모두 나빠져 생계에도 영향이 있다고 푸념한다.

그렇더라도 풀과 나무는 북한을 거쳐 백두산까지 이어져 있다. 백두산 화산 지형의 넓이는 경기도 면적에 맞먹는 1만㎢에 이른다. 조선족자치주의 20%가량 되는 크기다. 그 가운데 90% 가까이가 숲으로 뒤덮인 ‘식물의 보고’다. 중국인에게도 인기가 있다. 백두산 숲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림’의 최상위권(2위)으로 꼽힌다.


백두산과 연변의 봄은 짧다. 4월 하순에 시작해 5월이면 지나가버린다. 반년의 겨울, 석 달의 여름에 비하면 잠깐이다. 그래서 봄 풀꽃이 더 아름답다. 우리나라에서 피는 풀꽃이 한 달쯤의 시차를 두고 얼굴을 드러내지만 절반 이상은 새로운 것이다.

바람꽃이 가장 눈에 띈다. 너도바람꽃, 들바람꽃, 홀아비바람꽃, 외대바람꽃, 바이칼바람꽃 등 국내보다 훨씬 다채롭다. 커봐야 20~30㎝ 정도이나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봄을 알린다. 꽃잎처럼 보이는 흰 날개는 꽃받침이고 가운데 노란 부위가 꽃이다. 꽃받침 아래의 녹색 날개는 꽃을 보호하기 위한 꽃싸개잎(포엽)이다. 잎은 대개 꽃이 진 뒤에 나온다. 종류에 따라 꽃받침과 꽃싸개잎의 개수와 모양 등이 다른데, 구별해가며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가장 먼저 피는 너도바람꽃은 이미 꽃이 지고 열매가 달렸다.

너도바람꽃

손잎제비꽃

털노랑제비꽃

바람꽃 못잖게 봄맞이에 분주한 식물이 제비꽃이다. 이곳 제비꽃과 바람꽃은 국내에는 없거나 중산간 이상 지역에 자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내에는 노랑제비꽃이 많지만 여기서는 털이 복슬복슬한 털노랑제비꽃이 나타난다. 왕제비꽃, 졸방제비꽃, 참졸방제비꽃, 뫼제비꽃, 간도제비꽃도 존재를 과시한다. 동그란 잎에 꽃도 풍성한 참졸방제비꽃은 해발 1200m 이상인 백두산 선봉령 등지에 흔하게 깔렸다. 이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손잎제비꽃과 만난 것은 성과 가운데 하나다. 손처럼 길게 갈라진 잎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듯하다. 대부분 자주색인 제비꽃은 흰색의 바람꽃과도 잘 어울린다.

진펄현호색

국내에 많은 현호색 종류도 조금씩 모양을 바꿔 곳곳에서 봄을 장식한다. 줄현호색, 조선현호색, 진펄현호색 등이 그들이다. 현호색은 괴불주머니 종류와 더불어 꿀주머니를 꽃 뒤에 달고 있다. 이곳 꽃들은 맑은 공기에 걸맞게 더 싱싱해 보인다. 진펄현호색은 새로 찾았다고 할 만하다. 해방 이전 학계에 보고됐으나 이후 발견 사례가 없었다고 한다. 진펄은 진 땅, 곧 습지를 말한다.


백두산은 1천여 년 전 고려 초기에 엄청난 규모로 폭발한 이후 크고 작은 분화가 이어졌으며, 그 용암대지와 화산재 위에 대규모 습지가 형성돼 있다. 길을 벗어나면 바로 습지인 곳이 많다. 축축한 땅 위에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리를 잡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낸다.

연변할미꽃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할미꽃 종류가 정겹다. 줄기 끝에 연한 분홍색 꽃이 하나씩 달리는 분홍할미꽃이 주로 나타난다. 색깔이 좀더 짙은 연변할미꽃도 가끔 보인다. 꽃이 아래를 향하는 것은 국내 할미꽃과 같다.

이곳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귀하고 예쁜 꽃들이 있어 더 즐겁다. 낭화붓꽃, 관동화, 조름나물, 산작약, 패모, 왜지치 등이 그들이다. 낭화붓꽃은 아직 백두산에서 좀 떨어진 도문시 장안진 일대에서만 확인된다. 보라색 꽃이 끝에 달리는데, 특이하게도 꽃줄기를 둘러싼 꽃싸개잎이 주머니(낭)처럼 볼록하다.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신기하게도 작은 꽃이 두 개 들어 있다. 비상시에 대비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관동화(땅머위)는 습기 있는 길가에 무심하게 자란다. 얼른 보면 민들레 같다. 우리나라 남쪽에 많은 털머위와 달리 잎이 꽃보다 늦게 나온다.

관동화

조름나물

조름나물은 습지에서 자란다. 백두산 북파 쪽 이도백하진 2습지에서 무더기로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국내에선 멸종위기 2급 식물로 지정돼 있으나, 이곳에선 여러 풀꽃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백작약 역시 국내 멸종위기 2급 식물이지만 곳곳에서 눈에 띈다. 재배하는 작약보다 키는 작아도 더 싱싱하고 탐스럽다. 이도백하 거리에도 심어 놓았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과 작약을 좋아했다.

패모

패모는 꽃 모양이 독특하다. 자주색 꽃이 종처럼 아래로 달린다. 꽃이 조개 모습이어서 ‘패’모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약재로 쓰이는 땅속 비늘줄기가 조개처럼 생겼다고 한다. 왜지치는 이곳에서도 고산 지역에 자란다. 선봉령 계곡에서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있다. 하늘색과 흰색 꽃이 너무 맑아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백산차는 일찍 꽃을 피웠다. 어린잎을 차로 만들어 마시지 않더라도, 식물체 전체에서 풍기는 향에 취한다. 애기기린초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으나 지금 모습도 좋다. 별 모양의 지난해 꽃받침이 꽃 같다.

참졸방제비꽃

국내 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더 청초한 풀꽃도 눈과 마음을 건드린다. 앵초, 구슬봉이, 붉은참반디, 노루삼, 나도옥잠화, 동의나물, 피나물 등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앵초는 산악 기후에 잘 적응한 침대와 같다. 이들 풀꽃은 이 지역과 한반도가 생태적으로 연결됐음을 보여준다. 국내 어디에나 많이 있는 애기똥풀, 꽃마리, 서양민들레가 여기서도 쉽게 눈에 띄어 반갑다.

백두산공원 위쪽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니 고산초원 풀꽃의 출발을 알리는 노랑만병초가 피기 시작했다. 백두산 위쪽은 아래와 달리 여름이 돼야 꽃잔치가 펼쳐진다. 낮 기온이 30도에 접근하면 봄꽃은 끝나고 여름꽃으로 넘어간다. 언제 피어도 좋은 게 꽃이지만, 가는 봄을 잡을 수 없으니 봄 풀꽃은 봄이 가기 전에 볼 일이다.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jisuk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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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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