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두 개의 고향’…30년 시간을 넘어 희망을 꿈꾼다”

58살에 첫 시집 ‘절망의 벼랑에서 새들은 깃을 갈고 둥지를 튼다’ 펴낸 김종두 시인

등록 : 2023-05-18 15:51 수정 : 2023-05-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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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다감했던 고향을 그리면서

뜨거웠던 80년대 문학에 눈뜬 청년

직장인 삶 살아가며 펜을 놓고 지내다

2020년 다시 ‘시의 세계’에 빠져 들어


과거 잊고 앞으로만 가는 시계와 달리

지난날 회환 품고 고향 다시 바라보며

‘마을 앞 팽나무’ 되어 한땀한땀 희망을 그리고


‘시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섬진강도 지켜봐

58살에 늦깎이로 첫 시집 <절망의 벼랑에서 새들은 깃을 갈고 둥지를 튼다>를 낸 김종두 시인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자신의 시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한 시인에게서 두 개의 고향을 본다.’

58살에 첫 시집 <절망의 벼랑에서 새들은 깃을 갈고 둥지를 튼다>(페이퍼로드)를 출간한 김종두 시인의 시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다.

<절망의 벼랑…>에는 김 시인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창작하고 퇴고한 시 88편이 담겨 있다. 창작 연도를 살펴보면 김 시인의 시들은 ‘1980년대 창작 시’와 ‘2020년 이후 창작 시’로 대별된다. 두 주된 창작 시기 사이의 긴 시간은 “생활인으로 살아가며 펜을 들지 못했던 세월”이었다.

긴 단절의 시기가 있었음에도 김 시인의 시를 꿰뚫는 주제는 하나다. 바로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라는 지명 이상의 존재로 언제나 다가오는 ‘고향’이다. 김 시인의 대부분의 시들은 그가 태어나 자라고, 떠나서도 항상 그리워 하고, 반백을 넘은 나이에 다시 자주 찾게 된 섬진강가에 위치한 고향과 고향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종두 시인의 첫 시집.

‘가난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고향’

하지만 김 시인의 초기 시와 후기 시가 그리는 고향은 같은 고향이 아니다. 20여년의 공백기 동안 고향은 그만큼 크게 변했다. 그렇게 달라진 고향을 시에 담고 싶다는 열망이 그가 다시 펜을 쥐게 된 가장 큰 동력이었다.

그렇다면 두 고향은 어떻게 다를까? 먼저 1980년대에 그려진 김 시인의 시 속 고향을 살펴보자. 그 고향은 ‘가난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곳’이었다.

“꼬면 꼴수록/길어지는 가난을/아버지는 내내 꼬고 있었다.”(‘새끼꼬기–1970년대 가계부’ 전문)

그가 대학시절 지은 첫 시이기도 한 ‘새끼꼬기’는 1965년생인 그가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가난의 이미지다. 논밭뙈기도 거의 없는 시인의 아버지는 볏짚을 잘 추려놓았다가 늦은 밤까지 등잔불쪽으로 돌아앉아서는 새끼를 꼬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새끼꼬기는 “논 다랑이 두어 마지기 농사에/알알이 영근 가난들”(‘금천리공판장’ 일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땠을까?

“어머니는 고사리며 봄나물을 뜯어/새벽녘 첫차를 탔다./장으로 가는 어머니의 어깨에는/식구들이 매달려 있었다.”(‘금천정류소, 어머니를 기다리며’ 일부)

아버지가 밤 늦게까지 새끼를 꼬았다면,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새벽 일찍부터 움직였다. 하지만, 식탁은 빈번히 구호품 밀가루로 채워졌다.

“겨울철 밥상은 방부제 냄새로 찌든 수제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밀가루 포대엔 태극기와 성조기 아래/사내들의 굵은 팔뚝이 악수를 하고 있었다.”(‘금천정류소, 어머니를 기다리며’ 일부)

그런 가난 속에서도 시인은 고향 금천리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한다. 거기에는 ‘사람’과 ‘이웃’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벼랑 위 솟대처럼 목을 길게 빼고/바람이 허물을 벗는 시간, 막차를 기다린다.//(중략)저 멀리 희뿌연 등불을 달고/어깨에 달라붙은 눈덩이처럼 고단한 짐 쓸어안고/쓸쓸한 시간을 더듬으며 종점으로 들어오는 막차.//(중략)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별빛을 뿌린다.”(‘막차를 기다리며’ 일부)

김종두 시인이 서울 공덕동 한겨레에서 자신의 첫 시 ‘새끼꼬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 가난을 그린 시지만, 그 속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느껴졌다고 한다.

대학 진학 뒤 ‘문학회’ 활동으로 시에 대한 꿈 펼쳐

시인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것은 어쩌면 자식만은 그 가난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하고 싶었던 어머님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 탓인지 시인도 국문학과에 가고 싶다는 꿈을 접었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에 버스가 두 번 올 정도로 외진 고향땅 학교 도서관. 시인은 그때부터 그곳에서 여러 책들을 읽으며 시를 꿈꿨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품었던 국문학과 진학의 꿈. 그러나 그 꿈은 ‘장학금을 매개로 한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진학’이라는 현실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성균관대에 진학한 뒤 문학동아리인 ‘행소문학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시에 대한 꿈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도교수의 지도와 선후배간의 격의 없는 대화, 자주 이루어지던 품평회 등을 통해 시인은 ‘새끼꼬기–1970년대 가계부’와 ‘금천정류소, 어머니를 기다리며’를 비롯해 200여편을 창작할 수 있었다.

이철규 열사 추모시 짓고 집회에서 낭독

그 200편의 시 속에는 고향에 대한 시뿐 아니라 ‘그대 표적이 되어 갔는가, 추모시-고 이철규 열사를 보내며’ 등 현실참여적 시들도 포함돼 있다. 특히 ‘추모시’는 1989년 5월 서울지역대학생연합(서대련)이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에서 진행된 이철규 열사 추모집회에서 김 시인이 직접 낭독한 시다.

“그대 표적이 되어 갔는가./채 말 다 하지 못한 오월/또 무슨 큰 설붐으로 갔는가.//세상은 철시하고 빗장을 걸어/우리들의 비겁이 부끄러이 핀 부스럼길에/희희낙락 최루가루 흩뿌리고….”(‘그대 표적이 되어 갔는가, 추모시-고 이철규 열사를 보내며’ 부분)

당시 조선대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당시 25살) 열사는 같은해 5월10일 수배중인 상태에서 광주시 북구 청풍동 제 4수원지 상류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당시 ‘현상금 300만원에 1계급 특진’이 걸려 있던 이철규 열사가 누구인지 알아 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심하게 상한 주검으로 떠오르자, 전국은 들끓었다. 국가안전기획부와 경찰에 의한 타살일 것이라는 얘기가 전국을 강타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당당히 서대련 집회에서 추모시를 낭송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다시 찾은 배경을 시집 속에 기록해놓았다.

“1989년 5월 이철규 열사가 의문사를 당하자, 서울지역대학생연합 추모식이 성균관대학교 금잔디광장에서 있었다. 바로 전날 총학생회에서 추모시를 써달라 해서 새벽녘까지 이 시를 써서 추모식에서 직접 낭송했다. 울음 바다였다. 연필로 적은 원고를 학보사 여기자가 달라고 해서 가져갔는데 다음주 <성대신문>에 실렸다. 당시 총학생회장을 했던 이봉원(성대 신문방송학과 84학번) 친구가 최근에 후배들에게 부탁, 학보를 뒤져 이 시를 찾아주었다.”

시인은 그렇게 1980년대를 ‘시라는 동무’와 함께 고향을 그리고 시대와 호흡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그도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나가게 됐다.

1995년 현대삼호중공업 입사

한 대기업을 거쳐 1995년 5월 전남 영암에 위치한 현대삼호중공업(당시 한라중공업)에 홍보팀장으로 입사했다. “입사날까지도 바닥에 파일을 박고 있을 정도”로 신생회사였다. 외주사원까지 포함해 1만8천명의 직원들이 배를 만드는 현장에서, 그는 “청춘을 불사르며, 밤 10시고 11시고 일을 했다”고 한다.

중소도시에 해당하는 목포시와 영암군에 1년에 임금으로만 7,000억이라는 엄청난 액수를 풀어놓는 큰 공장이 열리자 조선소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관심 기업이 됐다. 날마다 많은 수의 방문객과 기자를 상대해야 했고, 사내 주간신문, 월간지, 심지어 사내 케이블티브이까지 운영해야 했다.

이렇게 매일매일이 전쟁 같은 상황에서 시를 짓기 위해 펜을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창작을 할 여유는 없었지만 그 세월에도 시집을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또 대학 때 지은 200여편의 시를 시간날 때마다 다시 보고 고치면서 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시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게 한 ‘회사원’이라는 신분은 2016년에 끝이 났다. 2016년은 조선업 경기가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걸었을 때다. 현대삼호중공업에서도 창사 이래 한번도 시행하지 않은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규모는 관리자 300명이었다. 그때 인력개발부장이었던 시인은 “총대를 메고”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해 말 자신도 희망퇴직 신청을 하면서 ‘마지막 희망퇴직자’가 됐다.

회사원으로 살았던 20여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마음은 크게 황폐해져 있었다.” 당시 그의 마음 속에는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다시 시를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늘 싸우고 있었다고 한다.

퇴사 뒤 황폐한 마음…시계 보면서 시심 찾아

그러던 중 다시 그의 시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손목시계였다. 삼호중공업 생활을 정리한 뒤 그는 틈만 나면 값싼 손목시계를 사 모았다. 집 안에 손목시계가 10개가 넘었지만, 시계를 사는 행동은 멈출지를 몰랐다. 그러다 문득 ‘지나온 세월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시계를 사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2020년 다시 원고지를 찾았다.

“시계를 산다/차마 시간을 살 수는 없어/시계를 산다.”(‘시계를 사다’ 부분)

시인이 보기에 시계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잘못 살아온 지난날을 지우고/앞으로 살아갈 날만 가리’킬 수도 있다.(이상 ‘시계를 사다’ 부분). 어쩌면 시인은 시를 짓지 못한 20여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시계가 보여주고 있는 그런 모습이 부러웠던 걸까? 그래서 10개가 넘는 손목시계를 사 모은 것이었을까?

시인은 그러나 그런 시계의 행태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인간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시간은 거꾸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우고 앞으로 살아갈 날만 가리킬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시인은 시계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지난날의 회환과 상처들을 가슴에 품고 다시 또 고향을 바라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2020년 이후 또다시 고향을 주제로 한 시를 쓰기 시작한 이유다.

김종두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을 살펴보고 있다. 김 시인은 앞으로도 섬진강과 고향 금천리를 “시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찾은 고향, 그러나 꿈을 잃은 듯 아파하는 모습에…

그러나 다시 찾아가 돌아본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시인이 시가 없는 세월 동안 고통받은 만큼, 고향도 그가 못본 사이 꿈을 잃은 듯 아파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낡은 기왓장처럼 게으른/마을이 할 일은 하루 내내 기다리는 것이었다./이따금 집배원이 들고 온 우편물에는/전기세나 수도요금 따위의 맹랑한 숫자만 적혀 있을 뿐/보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편지 한 장 오질 않았다./정거장에 우두커니 서서 막차를 기다려도/한 번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금천리 2’ 일부)

고향은 그렇게 정겨운 사람들이 떠나버린 황폐한 곳이 되고 말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금천에서 뛰어놀던 형과 동생들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비관하지 않는다. 시계처럼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그렇다 과거를 잊지도 않는다. 다만, ‘시라는 초침’으로 한땀한땀씩 아직은 남아 있는 희망을 그려낸다.

그는 그렇게 하나하나의 시가 쌓일 때 마을 앞 팽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어떤 비바람에도 견디는 팽나무가 되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시인은 이미 생명을 잃은 듯이 보이는 ‘목어의 소리’를 통해서도 희망을 듣는다. 시를 갈구하는 그의 마음은 ‘목어의 소리’ 너머에 묻혀 있던 ‘치어의 울음’에까지 다가가고 싶기 때문이다.

“골짜기를 흘러온 시냇물이/해찰하는 마을 어귀에/나는 한 그루 팽나무로 서 있었다.// (중략) 고향 어귀 늙어가던 팽나무처럼/사나운 바람 속 머리를 풀어헤친 채/돌아올 사람들을 그려보곤 했다.”(‘팽나무 아래서’ 부분)

“목어는 눈을 감지 않는다./뜬눈으로 불면의 세상을 잠재운다.// (중략) 말라붙은 비늘과 뼈로 남아/물기를 털어내듯 우는 목어/치어들은 어미 울음소리의 음표를 하나씩 물고 있다.”(‘목어’ 부분)

그래서 시인은 ‘절망의 벼랑에서/새들은 깃을 갈고 둥지를’ 트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더 내려갈 수 없는/밑바닥이라고 주저앉지’ 않는다.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희망으로 가는 첫걸음’임을 알기 때문이다.(이상 ‘희망에 대하여-죽마고우를 떠나보내며’ 부분)

“섬진강 막내 시인으로 불리고파”

시인은 앞으로도 섬진강에서, 특히 고향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금천을 중심으로 ‘희망으로 가는 첫걸음’을 쉼 없이 찾아나설 예정이다.

“섬진강은 박경리·정호승·김용택·이원규 등 이름 있는 문인들의 고향이거나 문학의 산실이었어요. 제가 늦깎이로 시집을 냈지만, 앞으로도 계속 섬진강의 물살을, 고향 뒤편 백운산의 봉우리를, 그리고 금천의 시냇물을 시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살펴볼 거예요. 그러면 어느날, 그 선배분들이 막걸리 한상 차려놓고, ‘어이 막내, 이리 오게’ 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꿔봅니다.”

늦깎이 시인 김종두. 그의 꿈이 현실이 될 그날을 기대해본다.

글·사진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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