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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은평 우리가 만듭니다”

침묵하는 의견 듣는 퍼실리테이터 지역사회 소통 도와 협치 큰 도움

등록 : 2017-03-23 16:08 수정 : 2017-03-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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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주민참여 지역발전회의에 참여한 주민들이 18일 낮 은평구 진관동 메뚜기다리 인근 인공폭포 정자에서 주민 참여예산위원회 현장회의에 참가해 지역 현안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의견지에 적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로 시작할까요? 오늘 돌아본 현장에 대해서도 한 분도 빠짐없이 의견을 말씀해주세요. 상대 말 끊지 않기, 정해진 발표 시간 지키기, 마음 상하지 않기, 규칙은 지켜주시고요.”

지난 18일 은평구 진관동 메뚜기다리 옆 정자에 2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아침 10시부터 시작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주제의 진관동 참여예산위원회 ‘현장 소통데이’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이다. 진관동 일대에서 진행 중이거나 계획된 환경자원회수시설,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8곳을 2시간이 넘게 돌아본 터라 지칠 만도 했지만 주민들은 전용희(42)씨의 말에 자세를 고쳤다.

각자 소개가 끝나고 주민들은 두 가지 색의 포스트잇에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엉뚱한 이야기도 환영합니다. 의견은 최소 1개 이상씩 남겨주세요.” 전씨는 주민들이 주저하자 추임새를 넣었다. 주민들은 긍정적인 의견은 빨간색에, 아쉬운 점은 연두색에 적어 하얀 종이에 붙였다. 진행 동안에도 전씨는 좌중을 살폈다. 전씨가 머뭇거리는 한 주민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오늘 기억에 남는 게 뭐예요?” 이어 주민이 “산책로 옆 실개천에 물이 흘렀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하자 신호탄이 터진 것처럼 다른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남기기 시작했다.

전씨는 소통 촉진자, ‘퍼실리테이터’다. 지난해 은평구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된 ‘말 통하는 이웃, 화합하는 주민모임 만들기’라는 주제의 퍼실리테이터 양성 과정을 수료했다. 오늘 모임은 전씨와 함께 교육을 수료한 동료 정재은(44)씨와 김혜영(51)씨 등이 이끌었다.

40년째 은평구 수색동에서 살고 있는 전씨는 ‘은평구마을지원센터’에서 주민 공모사업을 지원하고, 수색동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하는 ‘마을활동가’이기도 하다. “3년 전 친구 소개로 ‘주민운동’ 교육을 받고 나서 ‘나도 지역의 자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형제의 평범한 어머니에서 마을활동가로 변화한 순간이다.

은평구가 퍼실리테이터 양성 과정을 열게 된 것도 사실 전씨의 제안이 시작이다. “마을활동을 하며 의견을 내지 못하고 침묵하는 주민들을 보거나, 의견이 달라 갈등이 생기는 것들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우연히 퍼실리테이터를 알게 됐는데, 우리 지역에도 도입하면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서로 존중하며 더 완성도 높은 의제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씨는 퍼실리테이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2016년 은평구 참여예산’ 사업으로 ‘소통 촉진자 양성 과정’을 제안했다. 사업이 선정되면서 본인도 함께 지난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4월부터 10월까지 총 7개월 동안 진행됐다. 총 30명이 교육에 참여했지만 수료자는 17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다.

전용희(사진 맨 오른쪽) 퍼실리테이터가 18일 낮 은평구 진관동 메뚜기다리 인근 인공폭포 정자에서 주민 참여 예산위원회 현장회의에 참가한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역 현안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들을 중재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4주간 현장 실습으로 참여했던 숭실고등학교 학생들의 봉사활동 발굴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의견을 내고 ‘장애 청소년과 함께 자전거 나들이’란 최종 결과에 모두가 만족하는 모습을 봤죠. 이때 퍼실리테이터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됐어요.” 전씨는 이런 회의 방식을 어릴 적부터 배우면 친구끼리 다툼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 촉진을 위한 효과적인 질문법’과 ‘수렴과 결정을 돕는 도구’ ‘문제 및 갈등 해결’, 지역 현장실습까지 포함된 교육을 수료한 전씨는 지난해 겨울 수색동에서 퍼실리테이터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재생에 관한 주민 간 워크숍과 공모사업 의제 발굴을 돕는 일이었다. 교육을 함께 수료한 이들도 힘을 보탰다.

퍼실리테이터가 참여하는 새로운 진행 방식에 주민들은 크게 만족했다. ‘이런 것도 채택이 될까?’라며 의견을 내지 못했던 ‘깨끗한 거리 만들기’도 사업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교육을 수료한 17명은 ‘은평 소통 이룸’(이하 은소이)이란 모임을 만들었고, 현재 협동조합 설립 등을 모색하고 있다. 꾸준히 지역에서 활동하며 더 많은 퍼실리테이터를 길러내고, 교류를 통해 서로의 역량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은소이 회원들은 현재 은평구 참여예산과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등 지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회의에 초청되어 소통을 돕고 있다.

“저희는 지역에 전문성을 둔 퍼실리테이터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최종 목표는 은평구에 있는 5000여 명의 통·반장 모두가 퍼실리테이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행정이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바뀌겠죠?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민주적인 마을살이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전씨는 모두가 행복한 은평구는 더 많은 소통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은평구 역시 퍼실리테이터 활동에 긍정적이다. ‘다양한 지역 문제 해결에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며 올해도 참여예산으로 퍼실리테이터 양성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요즘은 아이들과 대화할 때,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신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보죠. 사교 모임에서도 상대방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죠.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다투는 일도 줄었고, 주변 사람들과 말도 더 잘 통하게 됐어요.” 전씨는 교육 수료 후 가장 큰 변화를 ‘무한 애정의 경청’과 ‘대화를 끌어내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사진 강재훈 <한겨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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