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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아닌 인간다운 삶”…기본사회 깃발 든 ‘구로’

이재명 정부, 불평등 해소 근본 해법으로 ‘기본사회’ 제시
구로구, 지난 7월부터 추진단 꾸려 토론회로 4개 분야 선정

등록 : 2025-12-11 15:41 수정 : 2025-12-1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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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5개년 계획과 기본사회 직원교육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는 장인홍 구로구청장. 구로구 제공

지난 4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보면 불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0.625로 2024년에 비해 증가하며 2012년 관련 통계작성 이래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소득 5분위(상위 20%) 배율도 5.78배로 역시 전년보다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구로 홍보관에서 학생들이 댄스 로봇 코딩을 배워 실습하고 있다. 구로구 제공

자산과 소득 불평등 관련 보도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고 함께 거론되는 전문가는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교수 토마 피케티다. 그는 방대한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2013년 ‘21세기 자본’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수익률이 언제나 경제성장률보다 높음을 설명하며 ‘불평등’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필연적 현상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8년 뒤인 2021년 그는 ‘평등의 짧은 역사’를 펴내고 1914년부터 1980년까지 대부분의 서구 국가와 주요 아시아 국가들에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눈에 띄게 완화됐다고 소개했다. 그 이유에 대해 피케티는 노조, 협동조합 등 사회적 투쟁과 소득과 상속에 부과한 누진세 등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이후 지금까지 다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면서 (기후위기나 인공지능처럼) 환경 자체가 전환되는 시대에 뚜렷한 목표 없이 자본주의를 방치하면 부자들을 위한 신식민주의, 부가 대물림되는 세습자본주의가 될 것이라는 경고도 내놨다.

지난 11월4일 미국에서 뉴욕 시장으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30대 조란 맘다니가 당선되고 열흘 뒤 시애틀 시장에 진보 여성활동가 케이티 윌슨이 당선된 것도 심화된 고물가와 주거 불안정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평등’을 향한 절박한 목소리가 투표로 이어진 결과로 보인다.

장인홍 구청장이 주민들과 함께 빗물받이 청소를 하고, 구로5동 환경공무관 휴게실을 찾아 근무 중인 공무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구로구 제공

지난 6월 이재명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불평등 심화에 더해 기후위기, 인공지능(AI) 전환 등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 대응을 위한 근본 해법으로 ‘기본사회’ 비전을 제시했다.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을 넘어선 새로운 대안으로, 단순히 취약계층을 구제하는 복지 차원을 넘어 ‘국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기본적인 권리를 사회가 보장하는 포용적 성장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체제임을 끝없이 입증해야 한다”며 “두툼한 사회 안전 매트리스로서 모든국민의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겠다”고 천명했다.


장인홍 구청장이 주민들과 함께 빗물받이 청소를 하고, 구로5동 환경공무관 휴게실을 찾아 근무 중인 공무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구로구 제공

이에 따라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 8월 ‘기본사회 실현’을 위한 주요 정책과제로 소득안전망, 공공서비스, 민주주의 심화, 사회연대를 제시했다. 이한주 전 국정기획위원장(현 민주사회연구원장)은 지난 9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기본사회’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기본’이란 최저가 아니다”라며 헌법 제10조가 규정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의 실현이며, (소득·주거·의료·돌봄 등)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균에 가까운’ 수준의 삶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기조 속에 행정안전부(장관 윤호중)는 정책 실현을 위해 먼저 지난 11월25일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자치혁신실 산하에 기본 사회정책과를 신설했다. 그날 발령받은 유지영 기본사회정책과장은 서울&과의 통화에서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로 기본사회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이 위원회는 돌봄, 소득, 의료, 주거, 통신 등 분야에서 국민의 기본적 삶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 과제를 수립하고 추진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라며 “내년 상반기까지 기본사회 관련 법안 제정을 목표로 전문가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에서는 25개 자치구 중 구로구(구청장 장인홍)가 가장 먼저 기본사회 실현 의지를 보였다. 이미 지난 7월 제21대 구청장 취임 100일을 맞아 ‘모든 주민이 삶의 기반을 보장받는 도시’를 표방하며 구로형 기본사회 실현을 위한 준비에 본격 착수했다. 8월에는 기본소득, 기본주거, 기본돌봄 등 정책 목표를 정하고 전담 ‘기본사회추진단(TF)’을 구성했다. 추진단은 최원석 부구청장을 단장으로 정책기획반과 사업총괄반의 2개 반으로 구성된다. 정책기획반은 기획경제국장이 반장을 맡고 기획예산과, 홍보담당관, 정책·정무보좌관, 협치조정관 등이 포함된다. 사업총괄반은 행정관리국장이 반장으로 총무과, 복지정책과, 주택과, 도시안전과, 도시계획과, 스마트도시과, 보건행정과 등이 참여한다.

추진단은 △기본사회 비전 및 과제 발굴 △기본사회 예산 패키지 관련 사업 재구조화 △2026년 예산안 및 조직개편 논의와 추진 경과 홍보 등 임무를 수행한다. 구는 9월 말 전 직원을 대상으로 기본사회 교육을 진행했고, 10월에는 ‘기본이 튼튼한 구로 만들기’를 주제로 시민 토론자 100명과 전문가 토론자 6명이 함께 대토론회도 열었다.

최원석 기본사회추진단장은 “지방정부들은 주민참여예산제, 주민공론화위원회, 농촌기본소득,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돌봄 어린이집, 취약계층지원사업, 고립가구 위기관리, 사회주택 등 사회적경제를 포함해 기본사회 취지에 부합하는 여러 정책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원석 기본사회추진단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구로구 제공

“중앙정부 정책 위에 지역 실정 맞는 기본사회 실현”

“2026년도 예산에 반영하고
사업 재구조화 세부 추진”

지역의 특성을 가장 잘 아는 지방정부가 기본사회 실현의 핵심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모든 지방정부가 같은 정책을 추진할 필요 없이 보편적인 중앙정부의 정책 위에 지역 특성과 실정에 맞는 지역형 기본사회를 실현하면 되는 것”이라며 “구로구는 대토론회를 통해 선제적으로 △사회서비스 △소득 △주택공급 △혁신행정 등 4개 분야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사회서비스는 복지, 돌봄, 보건의료, 교육 등 분야에서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지원하는 각종 제도 확장, 소득 분야는 일자리를 통한 근로소득과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을 통한 사업소득, 각종 수당 등 이전소득 강화 의견을 모았다. 주택 공급은 적극적인 재개발·재건축 지원단 활동을 통해 조기에 주택 공급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혁신행정은 주민 중심의 자치행정, 투명한 예산정책, 공익활동·사회연대경제 강화, 데이터 기반 AI 행정 구현을 내용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구는 이를 바탕으로 2026년 예산 편성을 하고 사업을 재구조화하고 세부 추진 체계를 마련할 방침이다.

하지만 이런 선도적 실천에도 불구하고 범정부 차원에서 기본사회 정책을 통합 관리하고 지자체와의 협업도 이끌어내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관련 법안이 내년 상반기에 통과되더라도 그 이후에나 구체적인 조직 구성과 운영 전략을 마련할수 있고, 지자체와의 협업과 분업, 기존 복지서비스와의 구분 등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제도 시행을 앞두고 대표 사업인 ‘농어촌 기본소득’에 대해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진보당 전종덕 의원은 지난 11월10일 기자회견에서 “인구 감소 지역 중 전국 7개 군을 선정해 매달 15만원씩 지역사랑상품권을 지급하는데 사업비의 40%만 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 60%는 도와 군이 부담하게 되면 지자체가 재원 확보를 위해 기존복지·농업 예산을 깎아 ‘조삼모사’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지영 행안부 기본사회정책과장은 “대통령의 의지가 강력하고 내년도 예산에 상당 부분 기본사회와 관련한 예산이 배정된 만큼 법 통과를 기다리지 않고 부처들과의 실무 협의를 진행 중이며, 자문회의나 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과 정책 방향을 논의하고 있고 위원회 출범 전까지 주요 분야별·부처별로 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세계적으로 심화돼가는 ‘불평등’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피케티는 사회적 국가, 누진소득세, 국경 넘는 세계자본세 도입에 더해 시민들이 의사결정과 소유, 이익에 참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나라마다 명확한 사회 지표를 가지고 새로운 형태의 주권주의를 실행하고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기본사회’가 불평등을 완화하고 국가 경쟁력과 사회 통합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21세기형 자본주의 재구성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동구 기자 dongg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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