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시골 마을의 늦가을 정취

서울, 이곳 l 도봉구 무수골

등록 : 2025-11-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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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근심 없는 무수골’, ‘세종 왕자 마을’이라고 쓰인 장승이 서 있다.

둘째 딸이 24살이다. MBTI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T. 쉽게 말해 추억이니 따뜻한 공감이니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며, ‘위로’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칼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얼마 전 친구의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보면서 괜스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매우 드문 일이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친구의 게시물에서 어린 시절 자신들이 다녔던 학교 앞 수학학원, 떡볶이집, 문방구 등의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이 그리웠단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 추억의 조각들이 어지간히 무딘 딸아이의 마음마저 뭉클하게 만든 것이다. 옛날이야기 하면서 그리움에 눈물 훌쩍이는 건 내 세대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딸아이도 낡고 때 묻은 것들에서 추억을 되뇌었다는 사실이 나는 새삼 놀라웠다. 추억은 빡빡한 일상 속에 숨 쉴 구멍을 열어주고 꽁꽁 언 마음도 말랑하게 녹인다. 나이, 성별, 기질을 불문하고 예전의 기억이 가져다주는 힘이란 게 분명 있다는 걸 딸에게서 보았다.

서울 도봉구에 무수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북한산 자락에 남아 있는 유일한 농경지. 봄에는 어린 모, 여름에는 파릇파릇 자라는 벼, 가을에는 황금물결, 겨울에는 눈 위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을 볼 수 있는 곳.” 서울시와 도봉구가 마을 입구 표지판에 적어둔 이 간결한 설명만으로도 무수골이 어떤 곳인지 느껴질 것이다.

무수골은 북한산 국립공원, 정확히는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 지구 초입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작지만 역사는 깊다. 마을 입구 장승에 ‘근심 없는 무수골, 세종 왕자 마을’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세종대왕 때 마을의 유래가 시작됐다.

무수골을 지나 북한산 국립공원을 오르는 이가 많다.


원래는 마을에 대장장이가 많아 무쇠골, 수철동(水鐵洞)으로 불렸는데, 세종대왕이 이곳의 경치와 물맛을 보고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부른 데서 ‘근심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의 무수동(無愁洞)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국립공원 안에 있어 오랜 세월 개발되지 않아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곳. 반듯하게 잘 꾸며진 공원이 아니라 그저 사람 사는 마을일 뿐인데도 묘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는 곳.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전반부에 나오는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은 곳. 시골에서 자라지 않았는데도 왠지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주는 곳이 바로 무수골이다. 달큰한 숲 냄새 때문일까? 이상하게 무수골에 온 뒤부터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있다.

주말농장.

도봉구에 사는 지인에게 무수골에 대해 아는지 물어봤더니, 주말농장이 있는 마을이라고 답한다. 구민 중에도 모르는 이가 많은, 보물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무수골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아마도 논이 아닐까. 지금은 벼 베기를 모두 끝내고 논두렁에 쓸쓸히 허수아비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지만, 서울 하늘 아래 논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보다 특별할 수 없다.

벼 베기가 끝난 무수골 논두렁에 허수아비만 줄지어 서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을 ‘생각의 산파’라고 표현했다.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고 했다. 확실히 특별한 장소는 사람을 특별한 사유로 이끄는 힘이 있다. 슬쩍 듣자 하니, 우이봉을 향해 올라가던 어떤 부부는 옆에 있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자연의 회복력과 생존력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자연의 품에 안기어 도시에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도시에서 살수록 반드시 시간을 내어 자연을 만나고, 세월의 더께를 들춰봐야 하는 이유다.

자현암 앞 계곡에 아직 단풍이 남아 있다.

무수골의 가을이 저물고 있다. 황금물결을 이루었을 수확의 계절은 자취를 감추었고 한때 가을의 절정을 누렸던 풍요의 흔적은 가지 끝에 매달린 다홍빛 홍시뿐이지만, 나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충분한 쉼을 누릴 수 있었다. 근사한 카페도 없고 그 흔한 편의점도 없지만 한 시간쯤 가만히 마을을 산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걸음이 가뿐해졌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보물 같은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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