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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가족돌봄청년’ 위로하고파요”

가정폭력 딛고 가족돌봄청년으로 사는 음악인 김율씨

등록 : 2023-03-2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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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돌봄청년 김율씨가 지난 15일 관악구청 3층 휴게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조현병·뇌경색 앓는 아버지의 ‘보호자’

음악 재능 살려 자신과 같은 삶 ‘위로’

갑상샘암 수술 뒤 ‘지금 행복’에 집중

“너무 과한 돌봄은 자신에게 해로워”

“지금까지 살아온 제 삶이 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가족돌봄청년(영케어러) 김율(30)씨는 올해부터 보건복지부 ‘2030 자문단’으로 활동한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가 가족돌봄청년정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론과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김씨는 15일 “정부에서도 영케어러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고 있다”며 “아마 7~8월께 가족돌봄청년과 관련된 시범사업 계획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가족돌봄청년은 장애나 질병을 앓는 가족을 돌보는 청년을 뜻한다. 아직 정확한 실태 파악이 안 된 탓에 정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그만큼 가족돌봄청년의 삶은 고달프다.

김씨는 태어나던 해 부모님이 이혼해 조부모 손에 자랐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1년여 동안 요양원에서 재활하며 지냈다. 김씨는 고모 집에 얹혀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다시 함께 살았다. 이때부터 아버지한테 가정폭력을 당했다. “아빠의 폭력이 지긋지긋했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서울로 왔어요.” 집세가 싸다는 이유로 관악구에 정착했다. 처음에 반지하에 살다 지금은 옥탑에서 사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김씨는 서울로 온 뒤 아버지에게 종종 안부 전화를 했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답을 듣지 못했어요.” 그 이후 3년 정도 절연 상태로 지내며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냥 죽고 싶었죠. 그래도 좀 아까우니, 딱 1년만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고 생각했어요.”

김씨는 연극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음악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고자 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김씨는 음악에 아직 미련이 남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쓴 곡을 앨범으로 만들고 털자고 생각했죠.” 김씨는 2018년 11월 6곡을 수록한 첫 미니앨범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륵>을 냈다. “무뎌지지 않은 여린 마음, 아파하는 청춘들의 고립감과 우울감을 담았어요.”

앨범을 내고 한 달 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씨는 그때 아버지가 20대 때부터 조현병을 앓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고등학교 때부터 엇나가더니, 가끔 감당이 안 될 때는 절에 보낼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김씨는 그동안 아버지의 폭력성이 모두 설명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조현병을 앓는 걸 잘 몰랐을 수도 있죠.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병에 걸려서, 아파서 그랬던 거구나. 일찍 알지 못한 데 대해 분노와 죄책감이 들었어요.”

김율씨가 인터뷰하고 있다.

이때부터 김씨는 아버지의 보호자, 가족돌봄청년이 됐다. 김씨는 “아빠는 아픈 사람이고 내가 유일한 가족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미니앨범 발매 이후 ‘가난은 언제부터 죄가 되었나’ ‘이 세상에 모든 나에게’ ‘피해자다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등 네 곡을 차례로 냈다. 모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곡이다. “저한테 노래는 돈과 명예를 얻는 수단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통로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에는 어느 지점 이상의 상처나 아픔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하게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올해는 싱글앨범 ‘조현’을 발매할 계획이다. 김씨는 “가족돌봄청년 등 가족들의 입장을 담은 노래를 내고 싶었다”며 “아버지처럼 정신질환을 앓는 당사자와 가족의 아픔을 담은 노래”라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 5월부터 관악지역 공동체 라디오방송 관악에프엠(FM)에서 월 1회 ‘송마음살롱’을 진행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토크쇼’ 형식의 방송이다. 김씨가 직접 기획, 대본, 진행까지 맡았다. “지역민을 초대해 맨살같이 꾸미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죠.” 김씨는 주로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출연자로 초대한다고 했다.

“일단 제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요. 그게 아빠를 위하는 길이고 저를 위하는 길이죠.” 김씨는 아버지를 돌보는 사이 2021년 8월 갑상샘암 수술을 했다. “다행히 건강검진 때 발견했어요. 수술하고 6개월 뒤, 아버지한테 알렸어요.”

김씨는 올해 운전면허 자격증을 딸 계획이다. “학원 등록비와 시험비가 꽤 비싸더라고요.” 그래도 김씨는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해갈 생각이다. “암환자가 되고 나니 알겠더군요. 지금까지는 너무 생존에 급급했죠. ‘나중에 행복한 것’이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김씨는 “너무 과한 돌봄은 오히려 자신에게 해롭다”며 “그렇지 않아야 돌봄이 끝났을 때 억울함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아빠를 직접 집에서 모셔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김씨는 “몰입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된다”며 “내 삶과 아빠 삶이 따로 있다”고 했다.

“남을 웃기는 것을 좋아해요. 이제 슬픈 얘기 그만하고 싶어요.” 김씨는 “내가 하는 말이 사회에 필요해서 하지만,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자유롭게 하면서 웃음으로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글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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