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고구려 첫 도 읍 ‘졸본’은 ‘샛별’?…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⑫ 고구려 유적 빼곡한 지린성 지안에서 본 ‘고구려와 우리’

등록 : 2021-11-18 16:11 수정 : 2021-11-1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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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장군총. 석실이 있는 적석묘다. 누구 무덤인지 논쟁이 있으나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한 변의 길이가 20m로 규모가 크다.

‘졸본’의 한자풀이로는 의미 설명 안 돼

튀르크어로 ‘출판’이 ‘샛별’인 점 떠올라

상상하며 ‘고구려’ 조금 더 가깝게 느껴

삼국사기 실린 1‘, 3, 5, 7, 10’ 발음 추정 통해

‘고구려어-일본어 연관’ 등 가설도 나와

고구려 언어 등 기록 거의 안 남은 탓

지안시에 남은 수많은 고구려 유적은


우리가 모르던 고구려 안내할 연결고리

‘우리는 얼마나 노력했나’ 아쉬움 밀려와

2016년 4월 만주 여행을 계획했다. 중국어와 역사 공부를 함께 한 지인들과 여행지를 선정했다. 짧은 시간이라 백두산을 포기하고, 고구려 유적이 많은 지안(집안), 환런(환인)과 함께 내몽골 자치주의 츠펑(적봉)까지 찾는 계획이었다. 고구려 문화를 살펴보고, 고구려·고조선과 연결될 수도 있는 고대 훙산(홍산)문명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비행기로 선양에 가서 현지 조선족 도움으로 차를 구해 이동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총 5일간의 일정이었다.

광개토대왕비. 자연석을 그대로 비로 쓴 규모가 큰 비석. 비문에 대해 한-중-일 사이 논쟁이 많다.

호태왕릉. 많이 파손됐으나 규모가 장군총보다 크다. 왕릉 계단을 통해 석실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앞에 벤치를 만들어놨다. 관람객 편의를 위한 것이겠지만 자신들의 조상 묘라면 그곳에 벤치를 가져다놓을 수 있었을까?

먼저 랴오닝성 지안현을 방문해 고구려 첫번째 수도인 오녀산성과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방어시설인 환도산성을 찾고, 고구려 고분군, 장군총,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비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여행 전부터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며 도읍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졸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현재 많은 역사학자가 이 졸본을 환런현에 있는 오녀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졸본’은 무슨 뜻일까? ‘마칠졸’(卒)과 ‘근본 본’(本)으로 이루어진 졸본을 한자말로 풀어본들 이해할 수 없으니, 튀르크어 음성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싶었다. 튀르크어로 졸본과 음이 비슷한 ‘출판’(Çulpan)은 금성(샛별)을 뜻한다.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고구려인도 자신의 새 도읍을 ‘샛별’로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아직 역사학과 언어학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상상의 날개를 달고 돌아다녀본다.

지안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만포와 바로 접한 곳이다. 지안에서 남쪽으로 북한 지역을 바라봤다. 한강과 임진강에서는 ‘북쪽’을 향해 바라보고, 랴오닝과 지린에서는 ‘남쪽’을 향해 바라보는 북녘 땅이었다. 분단의 아픔이 다시 커져왔다.

선양에서 만난 조선족 박 선생은 우리 일행에게 차를 제공하고 운전과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말했다. 55개 어떤 소수 민족보다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가 경상도 상주 사람인데 일제강점기에 대동아전쟁에 끌려나가지 않으려 7살 난 어린 아들(박 선생의 아버지)을 데리고 이곳 선양에 와 살게 됐다고 한다. 박 선생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즉 중국식으로 말해 ‘항미원조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 산에서 숨어지내다 내려왔다고 한다. 전쟁 뒤에 보니 전쟁에 나간 마을 청년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참혹했던 전쟁, 그러나 박 선생과 나는 같은 전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나에게 퀴즈를 하나냈다.

“‘강물에 조선족과 한국인 두 사람이 빠졌는데 한 사람만 구한다면 누굴 구하겠냐’고 북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것 같아요?”

“글쎄요.”

“대부분 남한 사람을 구한다고 합디다.”

“왜 그렇지요?”

“조선족은 중국인이기에 같은 민족인 남한사람을 구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조선민족인데….”

만일 이 문제를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북한에 적대적일수록 ‘북한 사람은 조선족을 구할 것’이라는 오답을 제시할 것이다. 남북한과 조선족 등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내로 들어선 뒤 차가 어느 아파트 앞에 멈췄다. 그곳에서 고구려의 국내성 일부라고 소개하는 안내판과 약간 남아 있는 성벽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국내성 터는 남문에 옹성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성벽은 치(雉)라는 독특한 방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문 근처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장방형 또는 반원형으로 덧붙여서 만든 성벽 시설물이다. 전투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하는 데 효율적이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전 이사장(현 고구려·발해학회 고문)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까지 ‘치’라는 성벽 구조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선비족의 북위에서 일부 보일 뿐이라고 한다. 그 치를 통해 이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운 성벽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고구려를 소개하는 중국의 안내판. 자동번역기로 쓴 한국어 안내인데, 처음부터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소개한다. 고구려 멸망이 필연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럼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소멸도 필연적인가?

이어서 고구려 무덤군을 찾았다. 장군총이나 광개토대왕릉으로 알려진 규모가 큰 것도 있지만,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안내판에 쓰인 적석총 무덤군은 숫자가 너무 많아 놀라울 뿐이었다. 그 적석총들 사이를 걸으면서, 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중고등학교 때 이런 고구려 유적에 대해 배운 기억이 없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몇 개의 고구려 지명을 통해 그나마 1, 3, 5, 7, 10 등의 숫자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한산주 편’에서는 ‘칠중현일운난은별’(七重縣一云難隱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칠중현은 현재 경기도 적성군인데, 고구려에서는 이를 난은별이라 불렀다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7을 뜻하는 고구려어 ‘난은’(혹은 ‘나는’)이 일본어 7의 음가인 ‘나나’(なな)와 비슷하다는 점 등을 들어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연관 가능성을 얘기한다. 다른 이들은 더 나아가 튀르크어나 수메르어에서 그 유사한 음가를 통해 연관성과 의미 분석을 하기도 한다. 모두 우리가 고구려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었기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환도산성 아래 있는 적석총. 지안 지역에는 고구려 적석총이 1만2천 개나 있다고 한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로 중국과 교류가 이루어진 이후 우리는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 이후 우리는 얼마나 고구려를 알기 위해 노력해왔을까? 고구려에 대한 지안 등의 유물·유적이 우리의 선조 고구려 모습을 좀더 명확히 그려내게 할 수 있을까?

만주라는 땅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있는 버드나무와 끝없이 펼쳐진 너른 평야, 그리고 옆자리의 조선족 동포가 말하는 내용이 버무려지면서 ‘아! 고구려’라는 어떤 상징적 문구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라온다.

하지만 유적지 가는 곳곳마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홍보하는 중국의 어이없는 주장을 접하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의 갈 길이 여전히 간단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상념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내몽골로 차를 돌려 다싱안링(대흥안령) 산맥을 타고 훙산문명 유적지로 발길을 옮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고구려와 고조선을 만나기 위해서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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