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도쿄라이프

집 안에만 있지 않는 일본 노인들

등록 : 2016-06-23 16:08 수정 : 2016-06-2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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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일본은 아베 정부가 밀어붙인 안보 관련 법안으로 몹시 시끄러웠다. 일본 대학생 그룹 실즈(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 행동 그룹)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격렬한 반대 시위를 했고, 나 또한 주말마다 그 시위 취재를 하느라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마다 맨션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검게 얼굴이 그을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마주쳤다. 뒤에 멘 배낭에 붙어 있는 “절대 전쟁 반대, 안보법 반대!” “아베정권 퇴진!”이란 스티커를 보고 그 어르신들이 어디에서 돌아오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노인 대국’인 일본에서는 방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나들이와 바깥활동을 하는 노인들이 많다. 사진은 슈퍼마 켓에서 장을 보는 노인들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몇몇 할머니 할아버지는 스티커 구호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내 손자 손녀들을 전쟁터로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자위대에게 무기를 들게 하는 안보 관련 법안을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당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사는 다카다노바바 역 앞에 있는 은행이나 병원들은 오전 중에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붐빈다. 물론 볼일을 보기 위해 찾아온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상당수가 시간을 보내려고 뭔가 ‘소일거리’를 만들어 온다는 것이 은행 창구 직원의 설명이다. 혼자 집 안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볼일을 만들어 오전에 은행과 병원을 순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동네 병원의 간호사에게서도 여러 번 들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소일거리를 만들어 병원이나 은행을 찾는 고령자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는 것이다. 손님이 붐빌 시간에는 절대로 찾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 손님이 뜸한 오전에 들러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통장 정리나 혈압을 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동네 병원이나 은행의 오전 분위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랑방 같다. 때문에 사무가 바쁜 직장인들은 차례를 오래 기다려야 하는 피해 아닌 피해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 밖에 내어 이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속으로 ‘저 어르신들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이겠지’ 하면서 이해하곤 한다.

일본은 장수 국가다. 100살 이상 노인들이 무려 6만1568명(2015년 9월 현재 후생성 발표)이나 된다. 여기에 일본의 전체 인구 25% 이상이 70~80대 노인들이다. 게다가 사회가 핵가족 시스템이다 보니 배우자가 사망했을 경우 혼자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만큼 일본 고령자들은 혼자 여가 시간을 즐기는 데에 아주 탁월하다. 도쿄 시내 순환선인 야마노테선이 지나가는 스가모 역내 화장실에 가 보면 재미있는 풍경들과 만날 수 있다.

‘노인들의 하라주쿠’라 이르는 스가모 역 여자 화장실에는 화장을 고치는 할머니들로 늘 북적인다. 주말에는 더욱 심하다. 재래시장 어귀 작은 신사 앞뜰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할머니들에게 역시 멋진 모자를 쓰고 작업 거는 할아버지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네 시각에서 보면 “노인들이 웬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100세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70~80대는 마음 그대로 청춘이다.

그렇다고 일본 노인들이 마냥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 통행료 수금원이나 택시 운전사들을 보면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년층들이 대부분이다. 오래된 동네 상점일수록 주인의 연령대는 더욱 높아진다.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이어지는 ‘와세다 도리’(와세다 거리) 맨 끝자락의 한 문방구 여주인은 90살이 훨씬 넘었다. 잡지류와 문구를 파는데, 동네 주민들은 주인할머니가 이제는 100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70대 후반의 고령에도 밤마다 마지막 지하철 구내 정리를 하는 아키다씨는 일본 노인들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몸도 마음도 고목이 돼 그대로 굳어버리지.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이 괜히 일거리 만들어 병원이나 은행을 순례하는 거야. 그곳에 가면 적어도 몇 마디 대화는 나눌 수 있거든. 게다가 여름과 겨울에는 냉난방비에 드는 전기료도 절약되고. 혼자 사는 이들의 삶의 지혜라고나 할까. 이런 사실을 병원이나 은행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거지. 공생해야 하니까.”

이런 노인 거주자들로 둘러싸인 우리 맨션이다 보니 나는 아직도 젊은이 대우를 받는다.

글 유재순 일본 전문 온라인매체 <제이피뉴스>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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