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열사의 큰 그림자에 가려진 그 부인의 선각성

종로구 안국동 이준 열사 집터

등록 : 2019-03-21 14:46 수정 : 2019-03-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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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순국 110년 만에 설치돼

다른 푯돌 내용보다 친절한 설명

사위가 쓴 <이준선생전> 근거로

집터 추정해 푯돌 설치

여성 선각자인 부인 이일정이 연

첫 부인상점 터라는 사실은 소홀

민중 계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녀를 위해 따로 푯돌 세워야


서울 종로구 안국동 148 건물과 건물 사이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이준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서 있다. 그 앞을 한복 입은 여성들이 지나간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종로구 안국동 148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 일성 이준(1859~1907) 선생 집터 푯돌을 찾아 길을 떠난다. 집터는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안국동 163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안국동 155 우체국, 안국동 153 빵집, 이 세 건물을 차례로 지나면 만난다. 철판으로 만든 신형 푯돌은 이층짜리 작은 빵집과 덕성여대 해영회관 빌딩 사이 후미진 곳에 마치 신주(위패)를 모신 감실(龕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처럼 깃들어 있다. 건물 사이에 버려진 1평 남짓한 자투리땅에 푯돌이 서 있고, 푯돌 뒤 건물 벽면에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옹색하지만 경건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용해 사라진 역사 현장을 되찾은 절묘한 공간 활용법이다. 도심 번화가의 기념 공간이 마냥 거창할 순 없지 않은가. 해영회관 빌딩에 걸린 대형 은행 간판이 오가는 이의 시선을 유혹하고, 푯돌 공간이 두세 걸음에 불과하다보니 자칫 방심하면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집 나간 소중한 근대사 한 조각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만난 것이다.

푯돌에는 “이준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상점(婦人商店)을 연 곳이기도 하다.”라고 적혀 있다. 단 두 문장이지만 일목요연하다. 또 푯돌 뒤 해영회관 벽면에는 이준 열사의 사진과 행적을 국문과 영문으로 적어놓았다. 사건의 개요와 이를 보도한 외국 신문 지면도 빠뜨리지 않았다.

푯돌 한 개만 달랑 서 있는 형식적인 여타 푯돌과 비교할 때 친절하다. 그 이유는 푯돌의 건립 경위에 있다. 2017년 헤이그 밀사 사건 1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섰다. 연구와 집터 찾기, 기념행사 개최, 설명 문안 작성과 달기를 도맡았다. 덕성여대에서 기꺼이 터를 제공했다.

2017년 7월14일 푯돌 제막식을 열 때 정부와 서울시는 숟가락만 얹은 격이다. 요즘 서울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푯돌 순례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관 주도로 세운 푯돌과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3월 종로구청에 표석 설치에 관한 청원서를 내고,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설치됐다. 그동안 뭐했는지 모르지만 이준 열사가 순국한 지 물경 110년 만의 일이다.

이 집터는 이준 열사가 살던 집이면서,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곳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주종 관계 없이 병존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준 열사의 집터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인상점이 있던 터라는 설명은 양념으로 곁들여진 느낌이다. 장소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집터의 이야기보따리는 ‘원조 부인상점’에 있는데도 말이다.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부인이자 동지’였던 이일정(1876~1935) 여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여사가 꾸렸던 민중계몽운동과 최초의 근대적 여성 전문용품점 ‘일정상회’를 소홀히 다룬 측면이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 지도. ‘이준 집터’라고 빨간색으로 표기된 안국동 153번지가 옛 이준 집터와 일정상회가 있던 청요릿집 ‘장송루’이다.

집터의 역사성은 뚜렷하다. 이준 열사가 밀사 파견 신임장과 친서를 받은 장소이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출발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3명의 밀사 중 이상설은 만주에, 이위종은 러시아에 각각 머물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밀명을 전달받은 사람은 이준이었다. 밀명을 받은 장소로 경운궁(덕수궁) 중명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밀사 파견의 특성상 근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신하기란 어렵다.

열사의 사위 류자후가 쓴 <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1947)에 유일하게 관련 대목이 언급됐다. “…역사의 날은 드디어 왔다. 때는 4월20일이었다. 시종 이종호씨와 박상궁이 밀조를 뫼셔 안국동 이준 선생의 자택으로 나왔다. …선생은 예복을 정제하고… 그 밀조와 해아밀사(헤이그 밀사)의 친임장은…”이라고 기술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을 맡아 집터를 찾아낸 이순우씨는 “40년 후에 사위가 출간한 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의 위임장을 받고 출발한 곳이라는 역사적 추정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이번 푯돌 순례기의 제목은 이준 집터로 정했지만, 내용은 최초의 여성상점 일정상회와 그 가게를 꾸린 이일정 여사에게 맞추려고 한다. 이준 열사에게 가려진 인물, 13살 연하 후처였던 이일정과 그의 이름을 딴 일정상회 창업의 의미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이준 열사는 이일정을 “나의 동지로서 부인계의 혁명 도령”이라고 평했다. 류자후의 <이준선생전>에 따르면 “총명다기한 이일정 여사는 실로 동지와 같은 감이 있어, 군국사(君國事, 임금과 나라의 일)와 사회운동 등에 있어 의논하며 공동 활동할 것을 약속했다”라고 썼다.

실제 이일정은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해 만들어진 공진회 회장 이준과 간부들이 체포되자 시위 운동을 주도했다.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학비가 없어서 유학 생활을 접어야 하는 위기에 몰린 일본 유학생 21명에게 21원이라는 큰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여성도 독자적인 생활 기반을 닦아야만 한다는 지론을 실행에 옮기고자 1907년 2월 당시 안현(안국동) 11통16호에 가게를 내고 살림살이에 필요한 일용 잡화를 팔았다.

<황성신문>은 1905년 6월16일자 기사에서 “이준씨의 부실(후처) 모씨가 북서 안현에서 상점을 개설하였는데…경성 내에 잡화상점을 신사의 부인이 개설함은 처음이라…부녀 상업의 효시가 되리라 하더라”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일정을 ‘문명부인’(文明婦人)이라고 극찬했다. 이색적인 유리 진열장을 갖추고 외제 잡화를 진열한 뒤 청년 점원(김진극)을 고용하여 중산층 부인을 상대로 물건을 팔았더니 구경 인파와 매상이 폭주했다고 한다.

또 1928년 12월에 발행된 대중잡지 <별건곤> 제16·17호 ‘각계 각면 제일 먼저 한 사람’ 기획 기사 중 ‘부인으로 상점을 먼저 낸 사람’이라는 글에서 일정상회를 소개했다. “…근래에 와서는 소위 무슨 부인상회, 무슨 부인상점, 심지어 부인이발소, 부인다점까지 생겨서 골목마다 부인 무엇이라는 간판을 흔히 볼 수가 있지마는 과거 수십 년 전에 부인이 아직 문 밖 출입도 하기를 싫어할 때에 부인으로서 당당하게 상점을 내고 남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영업을 한 이가 있었다면 그 얼마나 선각한 부인이라 하랴.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서울 북촌의 한 요지인 안국동 가로변에는 일정상회라는 한 부인상회가 생기었으니…규모는 그리 크지 못한 한 잡화점으로 불과 2년 만에 폐점을 하였지마는…”이라면서 일정상회가 조선에서 부인상점의 원조이고, 이일정 여사는 여성 선각자였음을 공인했다.

1935년 5월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일정 여사의 부음 기사. ‘고 이준씨 미망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일정이 이역만리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유해를 찾으려고 외국을 떠도는 바람에 가게는 2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1920년 4월3일자 <동아일보>에 “남녀의 인격적 평등에 기반한 현모양처, 그것은 천역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부인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편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1935년 5월15일자 <동아일보>의 ‘고 이준씨 미망인 이일정 여사 장서(죽음)’라는 부음 기사가 마지막이었다.

이준 집터는 일정상회 덕분에 찾았다. <이준선생전>에 “안현 11통 16호”라고 그 위치를 적었고, “안동별궁(안국동 175, 옛 풍문여고 자리) 동쪽 담장을 지나 4, 5번째 집”이라는 구절이 단서가 됐다. 옛 지번으로 안국동 152번지에 해당했다. 일정상회를 근거로 자취를 더듬은 결과 ‘일석서장’이라는 서점과 청요릿집 ‘장송루’가 이 자리를 거쳐 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75년 안국동 148번지로 번지가 통합되고, 덕성여대 해영회관 건물로 변신한 것이다.

사실 이 푯돌의 제목은 ‘이준 집터’가 아니라 ‘최초의 부인상점 일정상회 터’라고 바꾸는 게 옳지 않을까? 그게 어렵다면 푯돌을 각각 세우는 것도 방법이다. ‘여성 선각자’ 이일정과 그녀가 운영한 여성전문점의 효시 일정상회는 단독 푯돌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이준이라는 큰 나무에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하는 이일정과 일정상회의 처지가 안타깝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l 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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