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소원을 빌며 부적을 팔고 사는 일본의 신사들

⑦ ‘공부의 신’ 기타노텐만구 등 교토 신사들의 연말연시 풍경

등록 : 2023-01-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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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해 아침부터 ‘하쓰모데’(한 해 첫 참배)를 하기 위해 많은 참배객이 기타노텐만구신사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마을 속에서 민중과 함께한 일본 신사

이제 종교보다는 천년 넘은 전통문화

장례식은 절, 결혼은 신사에서 진행

전국 8만 개 신사 ‘복을 파는 상점’ 구실


‘학문의 신’ 기타노텐만구, ‘합격 빨’ 유명

한국에서 온 젊은이도 기도 대열 합류


고구려계 건립 신사는 ‘교토 랜드마크’

‘매화 꽃말 부적’ 등 상술 돋보이는 곳도

일본의 신사(神社·진자)는 한국, 중국 등과 일본을 구별 짓는 특징의 하나일 것이다. 한·중과 달리 일본의 사사(寺社: 일본에서 절과 신사를 합쳐 부르는 말)는 여전히 도시나 마을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황국사관을 위해 민속신앙을 국가종교(神道·신토)로 삼는 바람에 좋지 않은 이미지도 생겼지만(신사 참배 강요, 야스쿠니신사의 전범 합사 등), 보통 일본인에게는 천 년도 넘은 오랜 전통관습이다.

신사는 전설상의 신이나 신격화된 실존인물을 제신으로 삼거나 주신 없이 여러 신을 모시기도 한다. 흔히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 있다고 하지만, ‘요로즈카미’(800만 신)라는 말은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오랜 신불습합(신토신앙과 불교의 융합현상)의 영향으로 절과 신사의 구분이 옅어지고, 불교의 부처와 신토의 토속신들이 뒤섞여 공존하다보니 하나의 신만을 믿는다는 생각이 오히려 이상한 관념이 되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에서 절(데라)이 내세 담당이라면, 신사는 현세를 담당한다. 많은 일본인이 생일이나 결혼 같은 삶의 이벤트는 신사에서 하고, 장례식 같은 죽음의 의식은 절에 맡긴다.

일본 전역에 8만여 개가 있다는 신사는 각각이 모두 별개의 종교법인으로, 고객(신도 또는 시민)에게 복을 파는 좋은 의미의 ‘영업’을 통해 종교적 정체를 유지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 관찰일 듯싶다.


기타노텐만구 본전 앞에 한 해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의 ‘하쓰모데’

교토에도 400여 개의 크고 작은 신사가 있다. 그중 특히 인기가 있는 신사로는 기온의 야사카신사, 후시미의 이나리대사, 그리고 필자가 사는 동네인 기타노하쿠바이초의 기타노텐만구가 꼽힌다.

2023년 계묘년 새해(일본은 양력만 쓴다)에 찾아간 기타노텐만구 신사는 하쓰모데(初詣: 새해 첫날 참배)를 하러 온 많은 시민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 신사는 학문의 신, 즉 공부의 신을 모시기 때문에 전국에서 수험생이나 학부모가 찾는 곳이라 학생과 청년이 많이 눈에 띄었다. 대학입시(1월 중순)를 앞두고 합격을 희망하는 학교 이름을 이 신사에 걸어두면 영험하다는 믿음 때문에 이미 수만 개의 부적이 산더미처럼 걸려 있다.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에마’)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험생’.

기타노텐만구는 일본 전역에 산재한 약 1만2천 곳에 달하는 ‘텐진(天神)상’의 총본사이다. 일본에서는 절이나 신사, 심지어 즐겨찾는 가게를 ‘○○상’(○○씨)이라고 의인화해 친숙하게 부르는 관습이 있다. 이 ‘기타노의 텐진씨’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845~903)라는 학자·시인·정치가이다. 그가 모함을 받고 유배지에서 죽은 뒤 교토에 화재, 역병, 낙뢰 등 재앙이 끊이지 않아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사지로 내몬 후지와라 가문이 서기 947년 이곳에 스가와라의 원령을 모신 신사를 지은 것이 기타노텐만구의 유래이다. 이후 근세기에 텐진상이 서당 구실을 할 때 교실에 걸린 스가와라 그림이 교육열 높은 농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면서 텐진상이 학문의 신으로 등극하게 됐다고 한다.

기도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도 ‘장시간’(?) 기도에 정신을 쏟는 젊은이가 보였다. ‘삼수생’쯤으로 여겨졌는지 뒤에서 기다리는 여성이 조금 사정을 봐준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젊은이 두 명도 만났다. 공시를 준비 중이라며 합격 소원 부적을 산다. 잔뜩 걸린 부적 더미 속에서 한국 이름이나 외국 이름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을 보니, 텐진상의 영험은 이미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한 대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부적 매화가지를 든 기타노텐만구의 참배객.

기타노텐만구는 해마다 2월 매화축제가 열릴 만큼 매화가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오모이노마마라는 꽃말을 가진 품종의 매화나무 가지에 ‘오모이노마마’(생각한 대로)라는 글귀를 매달아 1천엔(1만원)에 팔고 있었다. 스가와라를 상징하는 매화 가지에 “생각한 대로 꽃을 피울 것”이란 암시를 담았으니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자 상술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오모이노마마 한 가지를 사들고 경내를 돌며 세상의 모든 청년을 위해 ‘생각한 대로’를 외어주었다.


후시미이나리신사의 명물 ‘센본도리이’. 총연장 4㎞에 약 1만 개가 세워져 있다.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稻荷大社)의 ‘센본도리이’

텐진상이 공부의 신이라면 ‘이나리상’은 장사의 신이다. 일본 신사 8만 개 중 절반이 이나리신사라고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교토의 후시미이나리대사는 전국 이나리신사의 ‘대장’ 격이다. 이 신사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센본도리이’(千本鳥居) 터널 때문이다. 신사를 상징하는 도리이를 길게 늘여 세워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며 소원을 빈다는 센본도리이가 총 4㎞에 걸쳐 1만여 개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다 도는 데 2시간쯤 걸린다. 과연 상업의 신사 총본산다운 스케일이다. 도리이마다 그것을 바친 개인이나 회사 이름이 쓰여 있는데,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한다. 그것도 일정 기간 지나면 바뀌니 “영업하는” 입장에서는 1만 개의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가진 셈이다. 필자가 방문한 연말의 어느 날에도 한 도리이에 새로운 회사 대표 이름이 새겨지고 있었다. 신사가 기복의 전당임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볼 일도 아니다. 게다가 교토는 신사와 절이 2천 개에 달하는 도시다. 종교산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새해맞이를 앞두고 후시미이나리신사에 새도리이를 바친 사람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다.

후시미이나리신사는 7세기 신라계 도래인인 하타씨 일족의 씨사에서 출발해 상업이 발전하면서 장사의 신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나리라는 이름은 ‘쌀이 난다’는 의미의 이네나리(稻生)에서 나와 ‘쌀을 나른다’는 지금의 이나리(稻荷)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 생산의 신이 유통의 신으로 변모한 것인데,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에게는 설명하기 어렵다.


‘야사카상’이라고 ‘아저씨’처럼 친숙하게 불리는 야사카신사. 한 해 마지막 밤에 나쁜 기운을 태워 없애는 화제(火祭)가 열린다.

야사카신사의 섣달그믐 밤 불놀이

교토 시민에게 가장 친숙한 신사님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기온시장의 ‘야사카상’이 첫손에 꼽힐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번화한 시장통인 시조거리의 동쪽 끝을 천몇백 년 전부터 이 신사가 지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바로 앞 기온거리는 전통시장이자 이름 높은 유흥가다. 교토의 랜드마크로 많은 여행객의 집합장소이자 출발점 역할도 한다. 시조거리의 서쪽 끝을 지키는 마쓰오대사가 하타씨의 신사라면 야사카신사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운 신사이다. 역병 퇴치의 신인 우두천왕(원래 고향은 춘천 우두산이다)을 모셨는데 근대 일본의 신불분리 정책으로 우두신앙이 물러나고 일본 황족 시조신의 하나인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시는 신사가 됐다. 그런데 이 스사노오노미코토도 본래는 신라의 신이다. 돌고 돌아 다시 도래계 신으로 돌아간 셈이다.

야사카신사.

야사카상은 교토의 여름을 달구는 기온마쓰리를 여는 신사로 유명하지만, 섣달그믐날 밤의 오케라마이리(白朮詣·불놀이제사)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겨울축제이다. 해가 바뀌는 심야에 묵은 기운을 태워 없애는 화제(火祭)인데, 불씨를 집에 가져가 불을 붙이면 한 해를 무병 무탈하게 보내게 된다는 믿음이 있다. 한밤중에 불붙은 줄을 빙빙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야사카신사가 제공하는 특별한 교토의 정월 풍경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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