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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장이 동주민센터로 출근한 까닭은?

지난해 3월부터 서초구 ‘체인징데이’ 시행… 행정·기술 직렬도 파괴

등록 : 2018-02-0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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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 메주 띄우고 강남역 물청소

연인원 150명 국·과장 참여

부서 칸막이 넘어 협업 문화 확산

대한민국 지식대상 최우수상 수상

지난해 3월 체인징데이를 마친 뒤 조은희 구청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권영현 보건소장(네 번째) 등 부서장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다른 부서에서 경험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해 8월25일 권영현 서초구 보건소장은 보건소가 아니라 양재1동주민센터로 출근했다. 서초구의 부서장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 근무하는 ‘체인징데이'였기 때문이다. 권 소장이 양재1동을 특별히 선택한 이유는 저소득층과 장애인이 가장 많아 보건소와 연관이 많아서였다. 그러나 하루 양재1동장을 하며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주민이 아니라 신입 사회복지사였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주민을 찾아 방문하는 ‘찾동’(찾아가는 동주민센터)사업을 따라갔는데, 눈만 깜빡깜빡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사회복지사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요. 그렇게 순수하고 뭔가 해보려는 친구들이 주민을 찾아뵙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더라고요. 심지어 맞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까지 있다는 이야기에 주민뿐 아니라 사회복지사를 지원하는 상담 프로그램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구청으로 돌아온 권 소장은 직원들의 마음건강 프로그램을 조은희 구청장에게 건의했다. 대민 업무와 격무로 스트레스를 받는 직원들의 마음을 확인해 전문기관의 상담을 받아볼 기회를 제공하자는 내용이었다. “누구든지 힘들면 바로 상담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여러분이 힘든 거 알고 있고,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전하는 것부터가 시작입니다. 평소에는 구민의 건강만 챙겼는데, 체인징데이 덕분에 직원의 마음건강도 살필 수 있게 된 거죠.”

권 소장의 건의에 따라 서초구는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 구청과 동주민센터 직원을 대상으로 마음건강 검진을 했다. 시간제와 기간제 직원 모두가 했다. 43개 부서 260명이 검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약 10%인 27명이 위험군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40대, 직급별로는 8급의 우울감이 가장 높았다. 서초구는 이들에게 검진비와 상담료를 3회까지 지원했다. 권 소장은 “구청에도 마음건강센터가 있지만, 직원들이 꺼릴 것 같아서 서초구에 있는 정신의료기관 6, 7곳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앞으로 한 해 한 차례씩 마음건강 자가 검진을 하고, 마음이 건강한 직장 만들기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초구의 체인징데이는 지난해 3월 국·과장 40명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처음 시작됐다. 부서장이 다른 부서의 애로사항을 직접 느끼고 업무를 경험함으로써 부서끼리 칸막이 없는 소통과 협업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특히 “‘문과’인 행정직과 ‘이과’인 기술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리바꿈이 필요하다”는 조 구청장의 뜻에 따라 사회복지과장이 건축과장이 되고, 건축과장이 여성보육과장이 되는 등 직렬도 넘어섰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부서장은 한 번도 일한 적 없는 새로운 부서에서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했다. 이순식 교육체육과장은 청소행정과에서 작업복을 입고 강남역 일대 물청소를 했다. 주민생활국장이 된 하현석 안전건설교통국장은 저소득 홀몸어르신에게 전달할 된장을 담그기 위해 앞치마를 입고 난생처음 메주를 매만졌다. 권 소장은 “이과는 사실에 근거해 과학적 근거와 결과 분석을 통해서만 생각하는데, 문과는 창의적이고 같은 내용도 쉽고 편하게 풀어내더라. 예전에는 우리만 잡고 끙끙대던 일을 이제는 다른 부서와 협력해서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체인징데이를 마치면 하루 동안 담당 업무를 바꿔 일한 부서장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새로운 부서에서 경험하며 느낀 점을 공유했다. 하루 안전건설교통국장으로 양재천 등 현장 구석구석을 점검하느라 2만5000보를 걸은 권 소장이 “최근 산책로를 새로 포장하면서 몇 미터를 걸었는지 바닥에 적어놓은 표시가 지워졌더라. 산책하는 주민들이 확인하며 걷는 재미가 있으니 다시 그려줬으면 좋겠다”고 건의하자, 하 국장은 “나는 양재천에 가면 토목적 입장에서 제방 정비 위주로 살폈는데, 주민의 건강을 챙기는 보건소장의 시각이라 남다르다. 곧 정비하겠다”고 화답했다. 여성보육과장으로 근무한 안종희 건축과장은 “설계, 시공 등 어린이집을 잘 짓는 것만 큰일이라 생각했는데,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데 크고 작은 민원이 많아서 여성보육과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은 일만 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데, 이번 경험을 계기로 큰 시야를 갖고 꼼꼼하게 사업을 챙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섯 차례 열린 체인징데이에 연인원 150명의 국·과장이 참여했다. 함대진 홍보담당관은 “체인징데이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서끼리 업무를 교차 점검할 수 있어 업무 투명성이 높아졌다. 역지사지로 다른 부서의 속사정과 어려움을 알 수 있어 협업의 속도도 빨라졌다”고 평가했다.

서초구는 체인징데이 등 지식경영으로 구성원끼리 활발한 소통과 협력을 끌어낸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10월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대한민국 지식대상' 최우수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지난해 체인징데이 때 양재노인복지관장과 반포사회복지관장으로 출근해 산하기관의 행정을 경험했던 조 구청장은 “체인징데이는 부서 사이 칸막이를 허무는 협업 문화 확산의 계기”라며 “역지사지 행정, 서로 돕는 2등 정신으로 행정에 대한 안목을 넓혀 수준 높은 주민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사진 서초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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