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보 맘보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5-09-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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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No.03 Ink on Paper, 29×42㎝

다들 그런가, 나만 그런가, 가끔 여러 ‘생’(生)을 산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했던 일이 분명하며, 사람도 장소도 상황도 기억나건만, 생생한 느낌은 없고 영화의 한 장면 같기만 한 게…, 그게 정말 나였다고?

어려서 몸이 약했는지 나는 병든 닭처럼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차만 타면, 교실이든 일대일 수업이든 뭘 배우기만 하면, 또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꾸벅대 수능시험 중에는 “학생, 이렇게 포기하면 안 돼”라는 격려 섞인 염려도 샀다.

대학도 첫 수업부터 꾸벅거린 것은 물론, 첫 직장이던 컨설팅 회사에서는 보다 못한 후배가 창피하니 제발 클라이언트 안 보이는 데서 자고 오라고 항의도 했다. 당시 컨설턴트의 삶은 하루 열네다섯 시간 근무가 우스웠는데, 운동으로 체력을 쌓는 건 생각도 못하고 벤치석이 있던 손님 없는 다방을 하나 ‘뚫어’ 내 몸만 한 커다란 화분을 끌고 와 좌석을 가리고 쪽잠을 잤다. 나만 그렇게 치열하게 졸면서 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동료들도 회의실 문을 잠그고 테이블에 누워서 잔 사람, 화장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변기 양옆으로 다리를 벌려 문에 기대어 잤다는 사람 등, 무용담이 다양했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몇 년 전 코로나 시국, 그때부터 다니던 아담한 1인 미용실이 있다. 남자들 이발하듯 한두 달에 한 번씩 커트만 하러 가는데 15년 이상 나이 차이 나는 원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 년이면 여덟아홉 번 만나니 대부분의 내 친구보다도 내 근황을 잘 알고 있지 싶다.

주로 일 벌이기 좋아하는 내가 새로 시작한 도전에 관해 대화하는데, 얼마 전에는 갑자기 나에게 올여름 휴가는 어디로 가느냐 물었다. 상황상 올해는 어디 갈 계획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고 하며 맥락 없는 그 질문이 왜 나왔는지 궁금했다.

뜻밖에도 내가 졸아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직장인은 앉기가 무섭게 졸기 일쑤란다. 머리를 만져주면 잠이 오는 건지 늘 피곤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제가 잠보라서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럴 때 졸지 말라는 건 효과가 없거든요”라고 말문을 열더니 잠은 흥미로 깨워야 한단다! 그래서 고개를 자연스레 들고 있게 되는 높이에 티브이(TV)도 설치한 것이며, 잠을 깨우는 소재로도 날씨보다는 휴가 이야기가 좋다나. 좋은 휴가 계획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 잠이 깨기 마련이고, 계획이 없는 사람은 난 왜 휴가가 없지, 또는 언제 휴가를 갈지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 자연스레 잠이 활짝 깨더라고.

날 선 ‘주의·경고’ 대신 기분 좋은 흥미로 깨우는 그의 맘보에 지난날 번아웃이 왔을 때 만난 이들도 ‘잠보’였구나 생각이 스쳤다. 참고 버티다 오는 번아웃에 대한 해법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나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2주 정도 벼락 여행을 혼자 떠나곤 했다. 낯선 환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처한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게 환기되어 숨통이 트이기 때문인데, 그 못지않게 우연히 마주쳤던 감사한 ‘맘보’들 덕도 많이 봤던 듯하다.

그들은 어느 날은 배 끊기니 뛰라고 소리쳐 알려주던 좌판 상인들이었고, 혼자 줄줄 울고 있을 때 가만히 다가와 기도해준 할머니였으며, 속상한 나를 강변에서 묵묵히 기다려준 택시 기사이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상 속 ‘무서운 그들’과 달리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를 배려하는 이들을 보며 세상이 내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구나, 깨닫곤 했다.

지금은 그 둘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혼자 막막하고 갑갑한 순간 우리 삶에 후- 숨을 불어넣는 게 그런 다정한 맘보라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잠보들의 맘보 말이다.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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