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방찰방 우르르 탁!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5-08-28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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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Hot, 납량만흥 2025’Mixed Media on Paper, 43×66㎝

사람들의 오랜 환상을 품은 도시들이 있다. 프랑스 파리처럼 실제 방문했을 때 현실이 환상과 맞아 ‘완벽한’ 곳이 있는가 하면, 미국 캘리포니아의 햇살만 믿고 민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나섰다가는 호되게 고생하게 되는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도 있다. 저자 미상이 정설이지만 마크 트웨인의 문구로 자주 인용되는, “내가 겪은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는 말처럼 거긴 올해 아예 냉여름이라는데, ‘숨’이 턱 막히는 기후 이상을 겪고 있는 우리는 매일 납량을 고민한다.

문득 한여름 더위를 피해 나무 울창한 산에서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혜원 신윤복의 그림 ‘납량만흥’이 떠오른다. 그림 속 남녀는 팔을 한껏 펼쳐 빙 돌고 있는 모양새인데, 시원한 바람마저 느껴진다. 그런 걸 보면 실없이 궁금하다. 19세기 자연이 선사한 바람은 에어컨 바람만큼 시원했을까? 그리고 그려지진 않았지만, 근처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었을 계곡물. 그건 도심 공원의 바닥 분수 물보다 더 깨끗했을까?

한두 달 전, 아버지 병간호 중인 친구와 통화하던 때였다. 아무리 더워도 일주일에 사오일은 산책하려 노력한다니 몇 시에 나가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친구가 운동하도록 독려하려 한 말이었을 뿐, 실은 나도 사오일은커녕 하루나 이틀도 안 나가던 터다. 괜한 거짓말이 무안해 슬쩍 틀어서 대답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시간은 바닥분수 운영 시간이라고. 바닥분수 물은 깨끗하다, 아니다를 놓고 친구와 장난으로 투덕댔다.

그러고 나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 물은 깨끗할까? 며칠 후 공원 시설 운영에 관여하는 일을 하는 지인에게 물었다. 설명하기를, 어린이들이 노는 공원 바닥분수는 물놀이형(접촉형) 수경시설로 분류되기 때문에 일반 수돗물을 사용한단다. 서울시 물놀이시설 관리 기준에 따라 수질을 엄격하게 관리한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바닥분수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찰방대는 거며, 우르르 낮게 솟은 물줄기 위에 앉아 장난치는 것, 높이 치솟는 물기둥과 경쟁하듯 활처럼 튀어 올라 물을 손바닥으로 ‘탁’ 치는 놀이까지, 여기저기서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이 안심됐다.

친구에게 말도 했겠다, 오랜만에 바닥분수가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역시나 바닥분수는 오늘도 신바람으로 가득하다. 다만, 아무리 좋은 시설이 눈앞에 있으면 뭐 해, 함께 뛰어들어 물장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게는 그림의 떡이다. 하지만 기술뿐 아니라 제도까지 뒷받침돼 완성된 납량의 환경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찰방찰방 우르르 탁’을 보고 있노라니, 이 광경이야말로 21세기 ‘납량만흥’ 같아 웃음이 났다.

한국 수필문학의 부흥을 이끈 매원 박연구의 수필 ‘얘깃거리’를 보면 1997년에도 “초복(初伏)도 되기 전에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돼 시달림을” 받았단다. 그 더위에 지하철을 탔는데, 의자 아래에서 냉풍은커녕 열풍이 나왔다. 못 견디고 일어난 자리에 중년 부인이 냉큼 앉기에 마음이 켕겨 일어난 이유를 알려줬는데 그걸 듣고도 송골송골 땀 흘리며 자리를 보전하더라나. 그 모습이 마치 자기 대신 연옥에서 고행하는 것 같았다고 작가는 ‘미담’으로 둔갑시킨 이야기를 흘려놓고는 ‘사고의 비약’이라 핀잔 들을 걱정에 “불쾌지수가 높아지기 쉬운 계절에, 사고를 비약해서라도 아름다운 인식을 갖는 것이 납량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는가”라며 ‘정신적 납량’을 한다.


이 글이 갑자기 생각난 건, 아이고 더워…, 더워도 너무 더워서다. 참말이지 15도의 샌프란시스코도 눈앞에서 납량하는 아이들도 마냥 부럽다.

‘납량만흥’을 꺼내어 다시 들여다본다. 어라, 왼쪽에 앉은 양반 둘의 자세는 흐트러져 있고, 옷고름도 풀어헤쳐 있다? 어쩌면 ‘납량만흥’ 속 남녀가 즐긴 건 더운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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