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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N.01’ Mixed Media on Paper, 76.5×53.5㎝
어떤 고민에 대한 답이 우연한 대화나 독서중에, 혹은 스치는 정보 또는 콘텐츠에서 툭, 올 때가 있다. 애써 탐구하거나 깊은 생각 끝에 얻은 게 아니기에 선물 같은 이런 순간은 오랫동안 해온 고민이 기억을 넘어 마음에 자리 잡은 후에야 만나지는 듯하다.
얼마 전 호스피스 교육 모임에서 만난 베테랑 봉사자에게 대화를 청했다. 올해인지 지난해인지 누군가의 말에 호탕하게 대답하기를 “지금 여기 여자가 몇인데…, 소도 잡아!”라는 말에 얼핏, 애먼 소는 왜 잡나 웃었는데, 곱씹을수록 엉뚱하고 재밌어서 기억에 남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반짝반짝 활달한 그는 알고 보니 무려 70세! 나는 일 년 반째 호스피스 교육만 받고 막상 현장에 나가는 건 망설이던 터라, 호스피스 봉사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물었다. 그분은 당신 또래 한국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일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직장생활 후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오십 대 중반이 되니 무언가 해야겠다 싶었다나.
그래서 중풍·치매 환자를 즐겁게 해드리는 요양원 봉사를 시작했는데, 어르신들을 만나며 자존감과 정체성이 쑥쑥 자랐다고. 자연스레 호스피스 봉사 교육도 받게 됐지만 마지막 ‘숨’을 돌보는 공간이 아무래도 어렵게 느껴져 갈 마음이 쉬이 생기지 않더란다.
묵혀두고 고민해도, 웃는 일을 만드는 봉사 정도 하면 됐지, 싶었는데 대기업 임원이던 열성 봉사자 한 분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워서 봉사를 받는 게 좋으냐, 아니면 누워 있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게 좋으냐”라고. 누가 내게 그렇게 대뜸 양자택일하라고 하면 선뜻 대답 못했을 텐데, 그는 그길로 온누리 호스피스 봉사팀에 합류해 16년을 하루처럼 보냈다. 시작이 어려웠지 해보니 그건 ‘삶과 지식을 깊이 연결하는 일’이더란다.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는 다른 봉사자들에게 감동도 받았는데, 재밌는 건 상반된 경제·가정 환경적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지더라는 것. 당신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 왜 이런 힘든 봉사를 하느냐고. 지금껏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라는 말에 나도 덩달아 골똘해졌다.
봉사의 본질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역사회, 환경단체, 의료기관, 교육기관, 동물단체 등 활동 내용, 동기나 보람이야 제각각이라도 그 대상과 목표만은 명확한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즉, ‘숨’이 있는 생명이 대상이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게 목표라는 것. 호스피스 봉사를 가면 누구든지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한 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들은, 사람을 고쳐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난해한 문제라거나, 머리 검은 짐승에 관한 두려운 이야기며, 그러하니 사람에게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겠다는 절망 내지는 자조 섞인 결론들이 떠올랐다. 또 그와 반대로 극빈한 환경에서 자라 비극적 가정사를 겪은 ‘청춘의 상징’ 기형도 시인이 절망과 좌절을 노래했지만, 개인적 고통의 본질을 탐구하여 마침내 냉혹한 현실을 담담히 직시하면서도 절망을 딛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선언한 것도 스쳤다. 문득, 어쩌면 70세 그분의 봉사는 절망에 곁을 내어줌으로써 희망을 깨닫는 작업은 아닌가 싶었다. 그건 우리도 혹시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니 함께 섣부른 말들을 농담처럼 나눴던 이들에게 말을 한 번 건네볼까도 싶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는 반짝이는 빛을 찾아보자고, 그이가 기뻐할 일을 가끔은 몰래도 해보자고. 그 웃는 얼굴에 내 마음이 환해진다면, 그게 바로 선명한 희망의 증거 아니겠느냐고. 아예 내친김에 우리도 누구처럼 ‘소 한 번 같이 잡아보자’고.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봉사의 본질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역사회, 환경단체, 의료기관, 교육기관, 동물단체 등 활동 내용, 동기나 보람이야 제각각이라도 그 대상과 목표만은 명확한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즉, ‘숨’이 있는 생명이 대상이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게 목표라는 것. 호스피스 봉사를 가면 누구든지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한 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들은, 사람을 고쳐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난해한 문제라거나, 머리 검은 짐승에 관한 두려운 이야기며, 그러하니 사람에게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겠다는 절망 내지는 자조 섞인 결론들이 떠올랐다. 또 그와 반대로 극빈한 환경에서 자라 비극적 가정사를 겪은 ‘청춘의 상징’ 기형도 시인이 절망과 좌절을 노래했지만, 개인적 고통의 본질을 탐구하여 마침내 냉혹한 현실을 담담히 직시하면서도 절망을 딛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선언한 것도 스쳤다. 문득, 어쩌면 70세 그분의 봉사는 절망에 곁을 내어줌으로써 희망을 깨닫는 작업은 아닌가 싶었다. 그건 우리도 혹시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니 함께 섣부른 말들을 농담처럼 나눴던 이들에게 말을 한 번 건네볼까도 싶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는 반짝이는 빛을 찾아보자고, 그이가 기뻐할 일을 가끔은 몰래도 해보자고. 그 웃는 얼굴에 내 마음이 환해진다면, 그게 바로 선명한 희망의 증거 아니겠느냐고. 아예 내친김에 우리도 누구처럼 ‘소 한 번 같이 잡아보자’고.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