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의 고향 여의도

서울, 이곳 l 영등포구 여의도동

등록 : 2024-12-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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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14일 오후 1시, 탄핵 표결까지 3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여의도 지하철역엔 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내리는 사람만 가득하다. 오직 하나 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발걸음들이다. 국민은 권력 다툼뿐인 국회와 파렴치한 정부를 향해 민심을 표출했고,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뭉치면 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광장이 되고, 광장에서 뭉쳐진 목소리는 이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자산이 됐다. 의사당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면서 감동인지 울분인지 모를 격한 감정이 가슴에서 방망이질 쳤다.

여의도는 내게 유독 각별한 곳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단 한 번도 장래 희망이 바뀐 적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지만 줄곧 아나운서를 꿈꿔왔다. 지금은 한국방송(KBS)만 여의도에 남았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지상파 3사가 모두 여의도에 있었다. 수천 명이 지원해 고작해야 두세명이 뽑히는 그 엄청난 경쟁을 통과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나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양가감정으로 울적했다. 그럴 때마다 찾아왔던 곳이 여의도 광장, 지금의 여의도공원이 있는 자리다.

여의도공원

운동신경 둔한 내가 그나마 자전거라도 탈 줄 알게 된 건 대학 시절 자신감이 바닥날 때마다 여의도 광장을 찾아와 자전거를 내달린 덕분이다. 광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자전거로 달리며 내가 일하고 싶은 방송사를 쳐다보았다. 단지 방송사가 보이는 땅에 서있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렸던 20대의 나날들. 마포대교를 건너며 시야에 여의도 빌딩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가슴이 요동치던 그 시절의 간절함이 지금도 또렷하다.

내 꿈의 고향 여의도. 30여 년이 훌쩍 지나 광장이 있던 자리를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다. 절박함 때문인지 아니면 광대하게 펼쳐진 아스팔트 때문인지 내 기억 속의 여의도는 칙칙한 회색빛이었는데, 녹지로 탈바꿈한 여의도공원은 마치 글자만 빽빽한 지면 옆에 예쁘게 그려진 일러스트처럼 빌딩 숲 사이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서울달

동여의도와 서여의도의 높은 빌딩들 사이 호젓한 연못, 잔디밭, 조깅하는 사람들, 강아지와 함께 이리저리 뛰노는 사람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를 가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내 시선을 사로잡은 풍경은 올여름부터 띄우기 시작한 ‘서울달’이다. 모양은 거대한 열기구처럼 생겼지만 작동 원리가 다르다. 헬륨가스를 사용해 케이블로 지면에서부터 상공으로 수직 비행만 하기 때문에 안전한 게 장점이라고 한다. 밤에 올림픽대로나 강북강변도로를 달리다 빌딩 사이로 보름달처럼 떠오른 ‘서울달’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직접 기구에 올라타고 150m 상공에서 서울 야경을 감상할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레고 궁금했다. 나는 한참이라도 기다릴 각오를 하고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한 번은 탄핵 집회 때문에 운영하지 않았고, 또 한 번은 바람이 강해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달’에 탑승하고 싶다면 ‘서울달 정보 알리미’에 미리 접속해 당일 운행정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듯, 두둥실 떠오른 ‘서울달’ 위에서 2025년 새해 소망을 빌어보고 싶다.

그 시절 나는 아나운서 시험에선 거푸 낙방했지만, 1995년 케이블티브이 시대가 열리며 방송 시장이 대폭 확장되는 시대적 수혜 덕분에 꽤 최근까지도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일했다. 한 회사에 정착하지 못하는 긴장감을 늘 안고 살아야 했지만, 덕분에 방송 한 분야에만 안주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인생은 한판승부가 아니다. 어릴 적 꿈을 꼭 20대에 이뤄야만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됐다. 살아보니 꿈을 키우기에 인생은 훨씬 길다. 누군가는 20대에 꿈을 이루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50대가 지나고 60대가 지난 뒤에 전성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중단하지 않으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도 있고, 또는 내게 맞는 다른 꿈이 생겨날 수도 있다. 20대에 자전거로 달렸던 내 꿈의 광장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때는 승승장구하지 못하는 삶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덕분에 멈추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내 진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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