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한국서 가장 오래된 ‘이태리 식당’…한국인 입맛 맞춘 메뉴

을지로 라 칸티나 since1966

등록 : 2017-11-02 15:28 수정 : 2017-11-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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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흥건한 봉골레 “한국화된 맛”

마늘빵, ‘링귀니 라 칸티나’도 “명물”

음식 문화사적 가치도 높은 식당

1대 주인과 고 이병철 회장 친분

삼성빌딩 지하에 식당 자리 내줘

1979년 이탈리아 정부 공로훈장

1982년 이재두·벨라르디 공동인수

본격적인 이탈리아 식당 면모 갖춰


27년 일한 아들 태훈씨가 물려받아

51년 역사의 라 칸티나는 사장과 직원 9명이 모두 중년의 남자들이다. 대부분 이 식당에서 20~30년씩 인생을 바친 베테랑들이다. 그 자신도 27년째 일하고 있는 이태훈(52) 사장은 “정년퇴직한 직원이 있다는 게 우리 식당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오른쪽부터 이 대표, 한상선(57) 주방장, 정광원(48) 매니저, 손대성(50) 매니저, 임승환(56) 지배인.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이탈리아 파스타 집이야 새로울 게 없지만, 50년 이상 된 정통 이탈리아 식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건너편 빌딩 사이에 눈에 잘 띄는 녹색 바탕에 흰 글자로 ‘La Cantina’라고 쓴 간판이 보인다. 삼성빌딩 지하에 있는 이탈리아식당 ‘라 칸티나’이다. 1966년 문을 열어 현재까지 영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요리 전문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라 칸티나의 콘셉트가 바로 느껴진다. 아치형 입구, 대리석 비너스상, 붉은 벽돌의 바, 벽면을 장식한 전원 풍경화들이 붉은색 행커치프(장식용 사각 천)를 올린 테이블 세팅과 어우러지며 복고풍의 고전적인 아취를 자아낸다.

1982년 무렵 주문 제작한 수제 필라멘트 전등.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래된 수제 필라멘트 전등이 내는 은은한 조명, 라 칸티나의 머리글자를 새긴 고색창연한 주석 쇼플레이트(장식용 접시), 오랜 고객의 취향을 배려한 듯한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메뉴판 등에서 라 칸티나가 쌓아온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음식 맛에 관한 한 본토 맛과 현지 맛에 대한 호오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식당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한국인 입맛과 분위기에 맞는 이탈리아 요리를 추구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단골들의 사랑을 받는 요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기자가 취재하는 점심과 저녁 사이 준비 시간에도 예약전화가 간단없이 걸려온다. 평일에는 80석가량의 좌석이 거의 찬다.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함께 오고, 멀리 지방에서도 모임 예약을 한다. 단골층이 넓고 깊은 게 라 칸티나가 장수할 수 있는 동력이다.

껍질을 깐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링귀니 라 칸티나’는 ‘라 칸티나’의 명물이다.

라 칸티나의 대표 메뉴는 마늘빵과 양파수프, 스테이크와 봉골레 스파게티. 여기서 뽑은 납작국수에 조개와 새우를 넣고 흰 소스를 뿌린 ‘링귀니 라 칸티나’도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인기 메뉴다.

라 칸티나 대표 이태훈(52)씨는 라 칸티나의 장수 비결로 세 가지를 꼽는다. 한국화된 라 칸티나만의 맛을 고수한 것, 요리사 3명이 라 칸티나에서 보낸 시간이 합쳐서 100년에 이를 만큼 주방이 바뀌지 않은 것, 몇 십년에 걸친 어머니의 일관되고 정성이 가득했던 식재료 관리.

라 칸티나는 음식문화사의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은 식당이다. 1924년 조선호텔에 처음 프랑스 레스토랑이 들어선 이래, 미군 주둔을 거치면서 전개된 서양 음식의 수입(정확하게는 미국화된 서구 음식의 수입)이 어떤 과정으로 변화 또는 토착화되었는지를 현재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도시’ 서울이 라 칸티나를 보호할 가치가 있는 서울 미래유산(2013년)의 하나로 선정한 것도 이런 이유가 클 것이다.

#라 칸티나를 처음 개업한 사람은 김미자(미국 이민)라는 사교계의 명사였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도 친분이 각별해 그의 후원으로 삼성빌딩 지하에 이탈리아 식당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식당이 지하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 지은 이름 ‘라 칸티나’(이탈리아어로 지하 포도주 창고를 뜻한다)는 금세 정·재계, 금융계, 관계, 외교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식당의 하나로 발돋움할 정도였다.

1982년 ‘라 칸티나’가 주한 외국인들에게 돌린 영문 광고 신문. 이탈리아 음식의 기원을 설명하 며 라 칸티나가 정통 이탈리아 식당임을 알리고 있다.

서울에서의 이탈리아 식당 성공은 본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1979년 8월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는 김미자씨가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의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으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기사와 사진으로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라 칸티나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식당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그러나 라 칸타나의 첫 전성시대는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끝난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권력 상층부가 대거 교체되면서 기존 정·관계의 ‘사랑방’이었던 라 칸티나도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김미자씨는 가게를 정리하고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그녀의 남편은 당시 유명한 재미교포 안과의사였다)을 떠나기 전에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군 장교클럽 매니저 출신 이재두(2013년 작고)에게 인수를 제안한다. 그가 라 칸티나의 두번째 주인이자 현 대표 태훈씨의 아버지이다.

“당시 인수를 희망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김미자 선생님은 라 칸티나의 명성을 이어갈 사람으로 아버지를 점찍고 먼저 인수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홀 한켠에는 바가 있어 다양한 술을 즐길 수 있다.

#이재두는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고학으로 학교를 마친 뒤 미군부대에 취직했다. 장교클럽을 거쳐 당시 미군 전용 호텔이던 내자호텔 한국 지배인에 발탁될 만큼 미군들에게 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재두는 절친한 친구이자 내자호텔 총지배인을 지낸 이탈리아계 미국인 조이 벨라르디와 함께 1982년부터 라 칸티나를 경영하게 된다. 라 칸티나가 살롱 형태의 식당에서 명실상부한 정통 이탈리아 식당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이 두 사람의 동업 덕분이었다.

이재두와 벨라르디는 개업에 앞서 타블로이드 형태의 영어 광고신문까지 만들어 주한 외국사절과 주재 상사에게 뿌리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마케팅까지 선보였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람들이 집에서 먹는 진짜 이탈리아 요리를 맛보이겠다” “완전한 이탈리아식 요리에 가장 안전한 재료만을 쓰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 서구 음식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식재료였다. 요리법은 비슷하게라도 흉내낼 수 있지만, 본래의 식재료를 신선한 상태로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소시지, 치즈, 훈제 연어 등은 직접 만들었고, 귀한 재료는 인편을 통해 비행기로 들여오던 때였습니다. 링귀니 파스타 기계는 거의 자동차 한대 값을 주고 (미군부대를 통해) 구해 조립하다시피 해서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든 파스타는 칼국수 같다시피 했고.”

지금도 라 칸티나의 상징 같은 ‘스파게티 콘 레 봉골레’는 국물이 흥건하다. 처음엔 오리지널 봉골레 스파게티였으나 맛있는 중합 국물을 원하는 손님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점점 라 칸티나만의 국물 많은 봉골레 스파게티가 만들어졌다.

“초기엔 주말 손님의 90%가 외국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음식 맛이 한국화되면서 주 고객도 점점 한국 사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음식의 변화에 따라 고객도 한국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간 것이지요.”

아마도 이런 과정이 한국인이 만든 한국식 파스타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짜장면이 생겨난 과정처럼.

“1990년대 이후 외국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본토 맛과 다르다는 불만도 나왔지만, 아버지는 바꾸지 않았어요. 우리 고객이 좋아하는데 바꿀 이유가 없다고. 오히려 더 좋은 맛을 내는 데 집중하자고.” ‘한국 사람의 입맛’이라는 라 칸티나의 전통 아닌 전통을 가장 좋아한 사람들은 역시 오랜 단골들이었다. 그중에는 이른바 ‘삼성 메뉴’를 즐긴 이병철 회장도 있었다. “라 칸티나에 전용 룸이 따로 있었을 뿐 아니라, 계열사 호텔에서도 찾아와 요리법을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51년 시간의 흔적이 담긴 주석 쇼플레이트.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태훈씨는 막내아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식당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간의 주방 수업을 비롯해 식당에 관한 거의 모든 일을 밑바닥부터 배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장이 아니라, 27년째 근속 중인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직원들도 대부분 장기 근속자들이다. 임승환 지배인과 요리부장은 30년 이상의 세월을 라 칸티나에서 보냈다. 나머지 2명의 요리사도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수십년 단골들에게 라 칸티나가 추억과 향수의 장소라면, 이들에게 라 칸티나는 이미 인생의 일부이다.

이렇다 보니 미래의 라 칸티나에 전통은 계승과 동시에 극복의 과제로도 떠오르고 있다.

“젊은 고객이 늘면서 기존 고객과의 부조화도 종종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건물 임대 문제도 라 칸티나의 장래와 관련이 있다. 그는 삼성빌딩 매각설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매각이 안 되길 바라지만, 혹시 새 주인이 생기더라도 라 칸티나라는 식당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소중하게 평가해주길 희망한다.

“몇년 전 건물 리모델링으로 8개월을 쉬었는데 직원들이 거의 떠나지 않고 다 돌아왔어요. 가오픈을 한 날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홀이 손님으로 꽉 찼고, 한달 매출을 비교해보니 8개월 전과 다름없었습니다. 라 칸티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나 아버지만의 식당이 아니었던 겁니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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