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브람스의 선율처럼, 추억의 이름으로

안국동 브람스 다방 since1985

등록 : 2018-06-14 15:49 수정 : 2018-06-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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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안 되는 소수의 클래식 음악다방

대지 20평이 안 되는 작은 건물 2층

산울림의 ‘길모퉁이 찻집’ 연상케

30년 넘는 유지도 초라한 장소 영향

두 번째 주인 마리아 20년 넘게 영업

커피·브람스 사랑했던 부부가 첫 주인

단골도 “부디 문 닫지 말길” 기원

브람스 다방은 1985년 문을 열었을 때 분위기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의자만 몇 번 교체되었을 뿐 나무로 된 벽과 삐걱대는 바닥, 나무 탁자가 저마다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창문에는 브람스의 전신사진이 코팅돼 있다. 거리를 산책 중인 브람스가 막 다방으로 들어설 듯하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를 뜻하는 다방은 20세기 한국인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다방에 모여 친교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고, 사업을 진행하고, 심지어 결혼(중매)도 이뤄졌다. 신분 구별 없이 누구나 커피 한 잔 값으로 몇 시간을 보내도 되는 곳. 이런 한국의 ‘다방 문화’는 “지구촌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속(김윤식 <도시와 예술의 풍속화, 다방> 2012)이었다. 미국이 만든 세계 최대의 커피체인점 스타벅스가 한국의 다방 문화를 “베꼈다”는 우스개도 있다. 세계 곳곳에 자국 문화원을 두고 있는 미국 공보처는 1968년 한국의 다방 문화가 너무나 특이했던지 ‘다방-한국의 사교장’(Tea Rooms and Communication in Korea)이란 보고서까지 발간(부산 미문화원 작성)했다.

우연이겠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보고서가 나온 3년 뒤 스타벅스가 창립되고, 이 사업 모델이 미국 밖에서 가장 히트를 한 곳이 다름 아닌 한국(신세계 그룹)이란 사실이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마담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옛날식 다방’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의 도시에 즐비한 커피 체인·전문점·테이크아웃 가게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의 다방 문화가 형태를 바꿔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음악다방은 옛날처럼 지금도 드물다. 앞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사 대상인 “부산 시내 다방 100개당 음악다방이 0.5개꼴”에 불과했다. 다방 전성시대에도 제대로 된 클래식 다방 혹은 카페는 소수 마니아들만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에서 수십 년 동안 옛 음악다방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곳으로 대학로의 학림다방, 신촌의 미네르바 등과 함께 안국동의 브람스 다방이 있다. 브람스는 변화무쌍한 서울 도심 북촌 지역의 유서 깊은 다방 혹은 카페이다.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이름을 따 1985년 문을 연 브람스는 지난 30여 년 동안 서울 북촌 일대에 살거나 인근 인사동 나들이를 즐기는 음악가, 문학가, 교수 등 문화예술인과 언론인들이 즐겨 찾는 사랑방 혹은 아지트로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브람스 다방은 1985년 대학생 부부가 처음 문을 열었다.

브람스 다방은 율곡로와 낙원상가 쪽에서 뻗어온 삼일대로가 만나는 안국역 네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지하철 입출구가 없는 모퉁이에 대지가 20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이층짜리 타일 건물 2층에 있다.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1980년대 히트한 산울림의 노래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잊힐 만하면 생각나서 다시 가보게 되는 집”이라는 한 손님의 말처럼 누구든 저마다의 ‘옛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좁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의 벽을 오래된 나무판자가 둘러싸고 있다. 마룻바닥은 걸을 때마다 피아노 페달을 밟은 듯 삐걱삐걱 소리를 내 고풍스러운 목조건물의 풍취를 한껏 느끼게 한다. 개업 초기 겨울에는 조그만 난로도 있었음 직한 실내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 탁자들이 정겹게 놓여 있다. 한쪽 나무 벽엔 브람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푹신한 보라색 의자에 앉아 갈포에 흰색 페인트를 듬뿍 적신 천장을 올려다보면 돋을새김으로 새긴 브람스의 이름 알파벳이 실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최초의 주인과 실내장식을 맡았다는 그의 미대생 친구들이 브람스에게 바친 외경을 충분히 짐작게 한다. 검은 테를 두른 흰색 바탕의 직사각형 패널에 검은색 명조체 한글로 브람스 이름을 음표의 높낮이처럼 리드미컬하게 새긴 외벽 간판도 인상적이다. 다양한 의미 구조를 품고 있는 이 심플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디자인 덕분인지 처음 내걸린 그대로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길모퉁이 2층 음악다방은 옛 추억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현재의 주인 마리아(본명 조영희. 가톨릭 세례명 마리아는 본인과 친한 손님들이 즐겨 부르는 이름이다)에 따르면 브람스를 개업한 최초의 주인은 젊은 캠퍼스 커플 부부였다. 두 사람 모두 커피와 브람스를 사랑했다고 한다. 두 번째 주인은 독일 함부르크(브람스의 고향이다)에서 살다 귀국한 부부였다. 숨 막히는 월급쟁이 생활을 벗어나 “뭔가 의미 있고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한” 직업을 찾던 젊은 마리아가 1994년 가게를 인수한 세 번째 주인이다. 두 번째 주인 부인은 브람스를 마리아에게 넘기면서 눈물을 글썽일 만큼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애착이 가고 또 그럭저럭 장사도 되는, 놓치기 아까운 가게였던 것이리라.

브람스 다방 주인 조영희(마리아)씨. 1994년부터 25년째 브람스를 지키고 있다. 브람스에서는 차뿐 아니라 와인도 즐길 수 있다.

안국동 일대는 지난 30여 년 동안 서울의 여느 거리처럼 거리 풍경이 수시로 바뀌었고, 다양한 업종이 스쳐 갔다. 이런 목에서 고전음악다방(지금은 와인과 맥주도 판다)이 만수옥(부근의 설렁탕집)만큼이나 장수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브람스가 문을 연 1985년은 전철 3호선 안국역이 개통된 해. 새로운 역세권의 등장을 기대하고 문을 열었음 직하다. 가게 위치가 건물의 2층이란 점 때문에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고, 건물 자체도 작아 재건축 사업에 불리했던 점이 브람스가 헐리거나 업종을 바꾸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든 외부조건이었을 것이다.

브람스 다방 ‘마담’ 마리아는 유쾌발랄한 중년 여성이다. 알바들과 짜고 진상 손님을 퇴짜놓는 데 선수지만, 브람스의 전통을 해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손님에게 친절한 천주교도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위기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이 도와주셨다. 낮에 손님이 없으면 밤늦게라도 보내주시고,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쪽 길을 열어주셨다. 브람스의 하루는 매일매일의 기적에 대한 감사로 열리고 닫힌다.”

브람스의 기적은 또한 지난 30여 년간 브람스를 사랑한 사람들의 추억에 힘입고 있다. 30년 만에 왔거나, 1년 만에 왔거나 많은 이들이 같은 말을 한다. “부디 문 닫지 말고, 부디 아무것도 바뀌지 말고….”

한 음악평론가가 선물한 클래식 평론집이 커피와 함께 탁자에 놓여 있다. 브람스답게 음악인 단골이 많다.

다른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바쁘게 안국역 앞을 지나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곳에 오늘처럼 내일도 브람스가 거기에 있기를.

#브람스를 끝으로 ‘서울 백년가게’ 연재를 마친다. 연재에 응해주신 27개의 가게, 도움과 격려를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독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우리는 브람스에서 마지막 시를 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영화(원작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서 청년 시몽이 중년의 여주인공 폴라에게 작업을 걸듯이, 선생은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브람스’를 만났다. 알고 보니 브람스는 200년의 시공을 너머 손 닿을 곳에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1천 평 남짓의 폐생수공장을 빌려 얼음으로 피라미드를 쌓고, 붓다를 만들고, 진시황의 병마용을 연출하고 있었다. 선생이 작업 현장을 찾았다. 미명의 시간, 천 개의 얼음이 넘어지면서 깨지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하늘이 죽비를 치는 것 같다.” 도쿄 특파원을 지낸 일본문화연구가 조양욱 선생이다.

천생 선비인 선생의 공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는 당장에 친구가 되었다. 선생이 브람스를 소개했다. 12년 전의 일이다. 브람스는 그의 안식처였다. 모든 인생은 영화의 미장센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사대문을 돌아 집으로 가는 길, 우리는 어느새 브람스가 있는 2층 계단을 오른다. 주인장 마리아의 염화미소가 있다. 삐걱거리는 마루가 건네는 인사는 그대로 교향곡이 된다.

산이 높은 것은 골이 깊은 이유이다. 영혼을 공명하는 음악은 그 깊은 곳에 산다. 그 음악은 미물의 상처마저 치유한다. 스승의 아내를 사랑했으되 끝내 사랑을 이루지 않은 브람스. 브람스의 영혼이 두 세기를 지나도 음악으로 살아 있는 이유이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말했다. “시각에도 촉각에도 후각에도 소리를 느끼는 감각이 있다고 믿는다.” 예술은 세상과 공명하는 파장으로 생명을 얻는다. 아티스트는 세상과 공감하는 파장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공명한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 이것은 예술의 존재 이유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중한 소통의 꽃이다. 브람스에서 브람스의 영혼과 공감하는 일은 우리의 본성에 브람스의 음악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브람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를 부린다. 다 내려놓는다. 위스키 한잔을 마시며 탱탱했던 내 젊은 날의 초상을 회상한다. 하루를 벗겨낸 육신의 빈 공간을 브람스의 영혼으로 채운다. 우리는 브람스에서 브람스를 마시고, 마지막 시를 쓴다.

김아타/미술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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