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해주세요

말기 암 남편 둔 전업주부 “미래가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

등록 : 2017-04-13 14:13

크게 작게

Q.저는 57살의 전업주부이고 남편은 63살의 회사원입니다. 평생 가족에게 성실했던 남편이 최근 말기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입니다. 본인은 물론 저도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점차 쇠약해져 고통 속에서 죽어갈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며 간호할 자신이 없습니다. 정년 후 둘의 삶을 계획했고 ‘남들처럼 평균수명까진 살겠지’라고 당연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자 인생이 무서워집니다.

더욱이 여긴 한국이 아닌 외국입니다. 30년 전에 와서 여기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전업주부로 안락하게 살면서 대내외적인 일을 모두 남편이 해주어서 남편이 없으면 외국에서 어떻게 살까 불안합니다. 친구들도 있고 장성해 결혼한 딸 둘이 여러모로 도와주고 있으나 내 인생이 한없이 불행하게만 느껴집니다.

딸들도 공부를 잘해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제가 졸지에 불행한 여자의 대명사가 된 듯합니다. 물론 63살이면 살 만큼 살았고, 애들도 성장했고, 부자는 아니지만 연금으로 제 생활은 가능하니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여태 순탄했던 제 인생이 구겨지기 시작해서 나락에 계속 떨어지는 듯한 불안이 엄습하고 미래가 온통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배우자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남편을 간호해야 할까요? 서영혜

A.누구도 피해갈 수 없지만 결코 맞닥뜨리고 싶어하지 않는 일 앞에 서 계시는군요. 사랑하는 배우자와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서영혜씨는 이제까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당신의 삶이 불행의 대명사가 될까 고민하시네요. 실제로 남들에게 성공적인 관계라고 평가받던 부부일수록 불행이 찾아왔을 때 낭패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별의 슬픔보다 타인의 눈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지요. 아마 마음 깊은 곳에 부부 생활에 대해, 그리고 자식의 성공에 대해 자부심이나 으스대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자신의 불행을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불행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도 ‘불행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태도로 세상을 향해 잔뜩 주눅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행복에 대해서는 우쭐한 감정을 느낍니다. 행복과 불행을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행복이든 불행이든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에게 늘 사랑만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면, 부풀어올랐던 자부심이 꺼지면서 동시에 마음도 한결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서영혜님, 남편의 발병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인생에서 큰일을 만나 혼란스러울 때, 그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정해지기 때문이에요. 저에겐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할 독립’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남편에게 기대서 안락하게 사셨다니 역할을 바꾸어 상대를 보살피는 힘을 길러보세요. 아니, 친절한 가족들 때문에 여태 발휘하지 못했던 당신의 능력을 펼칠 때가 온 것이지요.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겁니다. 아마 당신은 자신이 생각보다 유능하다는 데 놀라실 거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적어질 겁니다.

죄책감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아픈 가족에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자신이 그를 아프게 했다거나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거기다 자기만 살아남는 것에 대해서도 죄스러워합니다. 생존자로서의 죄의식은 재난 현장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사별한 가족들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아픈 가족과 거리두기가 어렵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그리고 사랑한다면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환자와 하나가 돼서 혼미해지고, 쉽게 지치고 무너집니다. 그러니 보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세요.

다만 충분한 대화로 두 분의 부부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시길 권합니다. 남편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거든 막지 마세요. 이별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도 외면하지 마세요. 정 힘드시면 과거 남편과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농담하고 웃어보세요. 울다 웃으며 외로운 서로를 부둥켜안으세요. 슬퍼하는 것, 감정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쓴 알폰스 데켄은 사별과 맞닥뜨렸을 때, 남겨진 사람이 겪는 ‘비탄의 12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정신적인 타격과 마비, 부인, 패닉, 분노, 적의와 원망, 죄의식, 공상과 환상, 고독감과 억울함, 혼란과 무관심의 지난한 과정이 그것입니다. 이 과정을 충분히 겪어야 비로소 우리는 체념과 수용의 단계를 지나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그가 얼마나 가족들에게 필요한 존재였는지, 가족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도 말해주세요. 앞으로도 그 사랑이 변함없을 거라는 사실도 함께요. 이 모든 것을 말로 하시기 어렵다면 편지를 써보세요. 죽는 순간까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군가와 든든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아내가 오랜 투병 생활을 한 남편에게 쓴 실제 편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사실 당신이 중환자실에서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서로의 마지막 마무리에 대한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한 걸 후회했어요. … 여보, 지금 이 순간도 당신과 같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어서 고맙고, 당신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줘서 감사해요. 가끔 당신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건 이해해줘요. 내가 당신이 아니라서 그래요…. 당신이 내 옆에 살아서 따뜻한 살결을 만질 수 있고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요. 오늘 밤 좋은 꿈 꾸고 편안하게 자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백천문화재단) 중에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지면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blessmr@hanmail.net으로 사연을 보내 주세요.

박미라 마음칼럼니스트·<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