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다시 자유를 느낀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⑩ 경복궁 사거리~삼청공원

등록 : 2020-05-07 14:16 수정 : 2020-05-1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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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식사시간 깬 브런치는 자유 상징

서울시민이 주말에 즐길 수 있는 호사

코로나로 즐길 수 없어 결핍감 컸지만

다시 미술관·박물관이 살아나는 이때

작은 브런치에 큰 삶의 경이로움 만끽

오랜만에 브런치를 하러 나간다. 세상이 혼란해지면서 잃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주말의 브런치였다. 주중 고단하게 일하다 주말에는 늦게 일어나 커피 향기가 좋은 카페로 가서 아침 식사와 점심을 겸해 느긋하게 즐기고 새소리가 들리는 공원과 거리를 천천히 산책하는 것은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드문 호사였다. 멋진 전시회가 기다리는 미술관은 금상첨화다. 하지만 비일상의 일상화 기간이 너무도 길었다. 일상의 거리 두기를 통해 극도의 결핍감을 감수해야 했다. 위의 공복감처럼 정신과 문화의 공복감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1895년 영국의 가이 베린저라는 사람이 주간신문에 글을 쓰고 그다음 해 옥스퍼드 사전에 실리면서 브런치라는 단어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다. 20세기 초반 미국 뉴욕에서는 주중에 늦게 아침 식사를 하는 신문기자들의 습관이 점차 확대되면서 브런치는 뉴요커의 상징처럼 자리 잡게 된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 브런치라는 식습관을 보급한 주인공은 세기의 로맨티스트 에드워드 8세(1894~1972)였다. 미국의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스스로 영국 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는 윈저 공으로 불렸다.


기자들이 진을 친 영국을 피해 그가 달려간 곳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처 엔체스펠트의 성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오이겐 폰 로트실트 소유의 성에서 그는 골프를 즐겼으며,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 두 가지 문화 충격을 줬다고 한다. 격식에서 벗어나 색다른 패션으로 공식 행사에 나타난 것과 관습을 무시한 식사 습관이었다. 윈저 공은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기다 아침 늦게 일어나 많은 양의 아침을 먹었고 그 때문에 종종 점심을 건너뛰기도 하였다. 그의 패션 감각처럼 남다른 식사 습관은 곧 오스트리아와 독일 상류사회에 화제가 됐다. 윈저 공의 친구 오이겐은 이렇게 말했다. “윈저 공은 유럽 대륙에 브런치를 발명했다.” 스스로 왕의 자리마저 미련 없이 버렸던 윈저 공에게 브런치는 전통과 규범, 제약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했다.

이처럼 일상의 자유를 상징하는 단어가 브런치다. 나는 그리운 자유를 오랜만에 느껴보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삼청동으로 향한다. 브런치와 거리 산책 그리고 미술관이 기다리는 곳이다. 도시인들의 육체와 정신,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핵심 세 요소다. 경복궁 사거리에서 출발해 삼청공원 입구까지, 지도로 검색해보니 거리는 1.6㎞, 도보로 약 25분 소요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도시산책자란 여기저기 둘러보고 음식도 먹고 차를 마시며 관찰하는 사람이니 약 2시간을 계획했다. 삼청동에는 멋진 골목길이 많지만 일단 이곳의 주축도로인 삼청로 큰길을 따라 걷기로 한다. 좁은 인도에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잦은 출몰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다른 길과 달리 삼청로는 넓고 걷기에 쾌적하다. 평소 외국 관광객으로 넘치던 거리지만 지금 이 길은 호젓하다.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사거리에서 삼청동을 바라보고 좌측의 시선을 사로잡는 오브제가 고궁의 돌담이라면, 우측은 미술관이다. 나의 선택은 언제나 우측이다. 출판문화회관 옆으로 금호미술관, 갤러리현대가 서 있고 폴란드 대사관을 지나면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건너편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이곳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나는 출장을 가거나 여행할 때면 가급적 그 도시의 현대 미술관을 방문해보려 한다. 건강한 젊은이의 혈관처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그 공간에서 새로운 동력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동력과 통찰의 현장들이 코로나 탓에 굳게 닫혔던 문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두가헌

호중정원

갤러리현대 뒤편에 있는, 한옥의 고품격과 와인이 결합한 레스토랑 ‘두가헌’은 건물 구경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삼청파출소 옆에 위치한 ‘호중정원’은 4가지 색 큐빅 외양이 인상적이다. 애프터눈 티 세트가 유명하지만 오전 11시부터 문을 열기에 브런치 장소로도 좋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북촌의 골목길 유혹을 잠시 억누르고 오늘은 삼청로를 따라 총리공관 쪽으로 계속 걷는다. 근처에는 작지만 세련된 디자인 감각의 갤러리와 카페, 상점들이 있어서 잠시도 지겨울 틈이 없다.

서울서둘째로잘하는집

국무총리 공관을 지나면 ‘삼청동수제비’와 그 건너편으로 ‘서울서둘째로잘하는집’ 등 맛집이 기다리고 있다. 삼청동수제비는 한때 공무원들과 언론사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점심 약속 장소였으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서울서둘째로잘하는집은 1976년 가게 문을 열었을 때는 원래 쌍화탕 등 한방 찻집이었지만 지금은 단팥죽으로 유명해졌다.

더베이커스테이블의 독일인 사장 미하엘 리히터

오늘 내가 브런치 장소로 선택한 곳은 ‘더베이커스테이블’이다. 빵과 간단한 음식을 겸한 곳이다. 빵을 좋아하고 더욱이 독일식 빵이라고 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는 편이다. 원래 경리단 근처에 문을 열어 경리단길의 브런치 문화를 선도한 곳인데, 삼청동에도 문을 열었다고 해서 찾아가는 중이다. 삼청로와 북촌로가 만나는 삼거리, 인도와 네팔 음식점 ‘옴’ 바로 옆에 있다.

이태원 옆 경리단 1호점은 위치 때문인지 종업원이 모두 외국인으로 코즈모폴리턴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이곳은 외국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다. 오랜만이라 기대가 너무도 컸던 것일까? 베를린의 솔푸드인 카레부르스트(소시지에 카레 가루를 섞은 것)를 비롯해 음식은 전반적으로 가격 대비 기대 이하였다. 반면 베지테리언을 위한 빵을 많이 굽기 때문인지 이를 찾는 사람이 제법 많이 보였다. 마침 이곳의 주인 미하엘 리히터씨가 근무하고 있어 그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그는 독일 쾰른 출신으로 벌써 서울 생활이 15년 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빵을 만드는 가업을 잇고 있으며, 제빵 마이스터 자격증을 내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독일의 힘인 직업 정신이다.

나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있고 열심인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샘솟는다. 삼청동은 전통과 이국적인 것의 만남의 공간으로 변해간다. 구수한 빵 냄새 덕분일까? 아니면 아직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조심스러운 상황에서나마 감행한 오랜만의 외출 때문일까? 삼청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5월의 초록은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브런치는 그 자체로 자유였다. 너무도 경이로운 나의 하루였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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