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을 걷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할머니 산길’을 걷다

중랑구 봉화산둘레길~봉수대 꼭대기 4.5㎞ 산길

등록 : 2019-02-28 15:07 수정 : 2019-02-2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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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걸으며 푸근하다고 생각

봉화산 정상 매점 아저씨의 말

‘할머니 같은 산’이란다

구불거리며 자란 소나무들. 사진 장태동

마음이 푸근해지는 산이 있다. 중랑구 봉화산이 그렇다. 봉화산둘레길을 걷고 봉수대가 있는 정상에 오른다. 정상 매점에서 차 한잔 마시며 주인아저씨와 봉화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저씨의 첫마디가 ‘할머니 같은 산’이었다. 둘레길을 걸으며 ‘산길 참 푸근하다’고 생각했다. 봉화산둘레길을 걷다가 봉수대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4.5㎞ 산길이 사람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불암산과 수락산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멈춘다

경기도 구리시와 경계를 나누는 서울시 동쪽 끝 중랑구 북쪽에 해발 160m의 봉화산이 자리잡았다. 중랑구는 봉화산 둘레를 도는 4.2㎞ 산길에 ‘봉화산둘레길’을 만들고 가꾸어놓았다.

봉화산둘레길로 접근하는 길은 여러 개인데, 그중 신내공원 입구 봉화산 옹기테마공원 조형물 앞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봉화산 옹기테마공원 조형물 뒤로 난 길로 걷는다. 길은 신내공원다목적체육관으로 이어진다. 체육관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봉화산둘레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에 적힌 신내4단지 방향으로 간다.


숲에 만든 계단길. 사진 장태동

산이 작아 오르내리는 굴곡도 굽이도는 산길도 아기자기하다. 촘촘하게 선 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난 길 자체가 예쁘다. 그 길을 걸어도 좋지만, 풍경이 된 길을 그저 바라만 봐도 좋다. 얼었던 땅이 녹는지 흙길을 밟는 느낌이 부드럽다. 산비탈 응달 계곡에는 녹지 않은 얼음이 숨어 있는 게 보인다. 봄 속에 남은 겨울이 그 힘을 다해 쇠잔하다. 한파, 대설주의보, 동장군 등 이름만으로도 등등했던 겨울이 어린 봄 앞에서 스러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 오른쪽 산비탈에 배밭이 나왔다. 4월이면 배꽃이 피어 사위를 환하게 비추겠지…. 달빛 받은 배꽃은 그 향기처럼 은은하게 빛을 낸다. 전남 나주와 경기도 안성, 드넓게 펼쳐진 배밭의 낮과 밤을 함께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배밭 뒤 아파트 단지, 그 뒤에 불암산과 수락산의 바위 봉우리가 버티고 있는 풍경을 나뭇가지 사이로 본다.

숲길이 예쁘고 푸근하다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땀을 훔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겨울 외투를 벗으며 영상 1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 탓을 한다. 간혹 겨울옷을 입고도 태연하게 걷는 사람도 있지만, 십중팔구는 옷차림이 가볍다.

진 땅에 남은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포개며 걷는다. 길의 경사도를 낮추고 미끄러운 곳을 피하게 만든 나무계단과 데크길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촘촘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길을 걸으면서 길이 궁금하다. 이 굽이를 돌면 또 어떤 길이 마중 나와 있을까?

빽빽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길. 사진 장태동

흙먼지 풀풀 날리던 미루나무 신작로, 저 먼 산모퉁이에서 먼지가 일고 고향으로 들어오는 완행버스가 보이면 오늘은 오신다던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올라 가슴이 간지럽고 울렁거렸다. 그런 마음을 다 아는 할머니는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손주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까지 나갔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아주 오래된 엄마 마중길이 생각났다.

봉화산은 집집마다 옛얘기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옛 마을 뒷동산이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아이들 손잡고, 어르신 모시고 산책하는 지금도 살아 있는 뒷동산이다.

석인상이 있는 소나무숲을 지난다. 훤칠한 소나무가 아니다. 줄기를 비틀며 자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집안 숟가락 수대로 걱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 모습 같아서 마음이 쓰인다. 그런 소나무 숲길로 삼삼오오 모여 걷는 이들 앞에 봄이 열린다.

초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나온 젊은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산길에 있는 작은 바위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선글라스에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으로 지나가는 아줌마들, 할아버지 지팡이 걸음에 맞춰 걷는 할머니, 반소매 차림으로 산길을 달리는 젊은이, 봉화산은 그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다 품어준다.

신내공원다목적체육관으로 가는 길. 사진 장태동

당산나무와 봉수대가 있는 봉화산 꼭대기

중랑구청 0.25㎞, 봉화산 정상 0.38㎞라고 적힌 이정표를 만났다. 봉화산 정상 방향으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올라간다. 400m 정도 되는 오르막길이다. 봉화산 꼭대기에 매점이 있다. 매점이 있는 건물 한옥 기둥에 ‘봉화산도당굿보존위원회’라는 현판이 걸렸다.

봉화산도당굿은 400여 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 굿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됐다. 지금도 해마다 3월 삼짇날에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굿이 열린다. 산꼭대기에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다.

옛날에는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당산나무에 귀신 고양이가 산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어른들은 당산나무가 훼손될까,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해서 그랬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는 마을의 제를 지내던 당산 또한 아이들 놀이터였다. 커다랗고 높은 당산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서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봉화산 꼭대기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옛 아차 산봉수대 터에 세운 봉수대 모형. 사진 장태동

당산나무가 있는 봉화산 꼭대기에 봉수대도 있다. 조선 시대에 봉수대가 있던 터에 1994년 봉수대 모형을 만들어 세웠다. 봉화산은 아차산의 한줄기였다.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아차산봉수대가 이곳이다. 함경도에서 시작된 봉수가 강원도와 포천을 지나 이곳에 다다른 뒤 남산으로 전해졌다. 이곳은 남산으로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봉수대였다.

봉수대가 있는 산꼭대기 마당 한쪽에 전망대가 있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아파트단지 빌딩들을 대모산·구룡산·관악산·남산의 산줄기가 품고 있는 형국이다. 풍경의 오른쪽에 중랑천도 보인다. 이곳에 봉수대를 세운 이유를 알 것 같다.

봉수대 바로 아래 매점에서 차 한잔 하는 사이 해거름이 다 됐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는 데 매점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이 산은 할머니 같은 산이에요. 산에 들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어둑어둑해지는 산길, 종종걸음을 멈추고 편안하게 걷는다.

숲 길. 사진 장태동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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