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조선 최고 기인 토정 선생의 애민사상 깃든 곳

마포구 토정동 토정 이지함 집터

등록 : 2018-06-14 14:37 수정 : 2018-06-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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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역학자 표현 ‘한심’

주민들의 영모비가 더 ‘융숭’

정확한 장소 서울시와 마포구

따로따로인 점 납득 어려워

<토정비결> 토정 작품 여부 이견 분분

소금·바가지 팔아 백성을 구제한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으로

애덤 스미스 먼저 ‘국부론’ 주창


토정 집터 푯돌과 영모비가 서 있는 한강삼성아파트 옆 마포나들목 지나 마포대교 북단 경사길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옛 마포나루 터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조선 최고의 기인 재사 토정 이지함(1517~1578)의 토정동 138 집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지하철 5호선 마포역 1번 출구로 나가서 토정로에 접어들면 마포음식문화거리를 만난다. 옛 마포나루(삼개포구)의 영화를 재현한 듯 무려 169개의 음식점과 가게, 유흥시설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다. 그러나 색주가만 600~700개가 성업했고, 술을 빚을 쌀 수만 섬을 한 해에 소비했으며, 거리에 내놓은 술독만 1천 개가 넘었다는 전성기 마포나루와 비교하면 족탈불급이다. 이곳에선 마포라는 지명보다 토정로라는 길 이름과 토정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더 어울린다. M팰리스 웨딩홀 앞에 ‘월척을 낚은 운수대통 토정선단’이라는 나무 물고기 10마리를 매단 목어 조형물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기를 잡아 헐벗은 백성들에게 나눠준 토정 선생의 애민사상이 담겼다.

토정로를 중심으로 31길과 32길이 갈라지는 네거리 오른쪽 보도 위에 선생의 구휼 활동을 재현한 재미있는 4개의 브론즈 작품상이 있고, 반대편 래미안아파트 상가 앞 보도에는 죽장을 쥔 넉넉한 표정의 선생상이 서 있다. 조선 최초 양반 상인의 행색이지만 평범하다. 일화처럼 쇠솥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마포구에서 세운 ‘토정 이지함 선생’ 안내판이 그나마 친절하다. 사방으로 아파트 숲이 에워싼 32길을 따라 강변 방향으로 직진하면 왼쪽에 한강삼성아파트가 나온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102동 앞에 ‘토정 이지함 선생 집터’를 알리는 석물이 반긴다. 아파트 단지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기념석이다. ‘해방 직후까지 이곳에 집터가 남아 있었고, 옛 이름이 아랫토정 윗토정이라고 불린 토정리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진짜 푯돌은 단지 안 토정경로당과 어린이 놀이터 사이에 있다. 서울시에서 세운 푯돌과 토정동 주민이 2007년에 세운 영모비(영원히 기리는 비석)가 나란히 붙어 있다. 공식 푯돌에는 ‘조선 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 이지함의 집터’라고 밑도 끝도 없이 20자가 달랑 새겨진 반면, 영모비에는 ‘토정 선생에 대한 도덕적 애민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 토정동 옛 집터에 영모비를 세운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뒷면에 선생의 일생과 사상을 빼곡하게 새겨놓았다.

서울시 푯돌에 적힌 ‘역학자’라는 문구는 선생의 면모를 10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한 한심한 표현이다. 진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운세 풀이 책 <토정비결>의 저자로 선생의 진면목을 좁혔다.

서울에 세워진 300여 개의 푯돌 중 이처럼 융숭한 대접은 처음 본다. 종루의 주춧돌만 한 큰 돌을 받침대에 깔고 승용차 크기의 거대한 빗돌을 세웠다. 주민이 건립한 영모비는 서울시 푯돌이 못다 한 얘기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비록 아파트 단지와 방음벽 그리고 강변북로가 한강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토정 선생은 이곳에서 영면할 것 같다. 푯돌과 영모비가 경로당과 어린이 놀이터 사이에 놓인 장면도 보기 좋았다.

단지를 돌아 나와 강변으로 직진하다 방음벽 앞에서 좌회전하면 오른쪽으로 좁은 오르막길이 나온다. 마포나루터로 통하는 마포나들목이다. 늘 그렇지만 안내표지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다. 마포나들목을 통과하면 눈앞에 강변북로와 밤섬이 떠 있고, 강 건너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고층 빌딩 숲이 펼쳐진다. 왼쪽에 마포대교, 오른쪽에 서강대교가 걸려 있다.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뻗어 있는 이곳이 옛 마포나루다. ‘삼개나루’(麻浦浦口)라고 적힌 자연석과 마포나루 안내판, 토정 이지함 안내판, 마포나루 조형물이 줄줄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을 살피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포구가 세운 ‘토정 이지함’에 따르면 “토정의 본래 위치는 마포대교 북단의 용강동 마포유수지 부근이며, 선생의 집터는 마포공영주차장이 됐다”라고 적혀 있다. 3인3색이다. 토정의 집터를 주민 따로, 구청 따로, 시청 따로 추정하고 있다. 선생이 기거하던 마포나루 흙집은 과연 어디인가? 주민들은 한강삼성아파트 단지 초입 102동 앞이라고 하고, 서울시는 단지 안 경로당 옆에 공식 집터 푯돌을 세웠다.

사실 마포대교 북단 경사로를 따라 도화동 쪽으로 부지런히 올라가다보면 한강삼성아파트와 용강동 유수지가 서로 맞닿아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둘 다 옛 마포나루터 안쪽인데 유수지가 강변에 더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식민지, 전쟁과 산업화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서울에서 한강변 토정 선생 집터에 대한 정확한 역사 고증은 불가능한 실정이지만 ‘내 팔 내 흔들기식’은 곤란하다. 주민의 의견은 별개로 치더라도 서울시와 마포구가 따로 노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마포대교 북단에서 바라본 한강삼성아파트와 용강유수지 주차장. 토정 집터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마포나루가 서해에서 들어오는 황포돛배가 정박하던 항구였다는 사실을 지금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옛 마포나루는 경강(한강)의 중심 포구였다. 1817년 경강에 몰려든 상선만 1만 척을 헤아렸다고 한다. 여기에 작은 어선과 세곡을 실은 조운선을 포함하면 엄청난 수의 배가 마포나루를 드나들었다. 특히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 전국의 어물선은 모두 마포에 짐을 부렸다. 마포가 경강에서 가장 흥청거린 이유는 300톤 이상 큰 배가 정박할 정도로 수심이 깊었고, 200척 이상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정도로 넓었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크지 않았고, 쌀과 소금 등 7개 시장의 유통 기능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마포나루 풍경. 한강에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나루터가 주요 교통로이고 시장이었다. 마포구 제공

<토정비결>이 토정의 작품인가를 놓고 이견과 이설이 난무한다. <이지함 평전>을 쓴 건국대 신병주 교수는 “누군가가 토정의 이름을 빌려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며 가탁설(빌려서 썼다는 설)을 주장했다. 후손인 이정익이 선생의 유고를 모아 펴낸 숙종 대 문집인 <토정유고>와 조선 후기 세시풍속 서적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나 유득공의 <경도잡지> 등에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결정적 이유였다. 그러나 <정감록>을 연구한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은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며 “이지함이 남겼을 법한 저술”이라고 말했다.

토정은 살아생전 기인, 도사, 사또, 큰선비로 유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토정비결>이라는 운세풀이 책과 야사에 사로잡혀 선생을 떠돌이 예언가 정도로 한정 짓고 있다. 그는 목은 이색의 6대손이자 동인의 영수 이산해를 조카로 둔 명문가 출신으로 화담 서경덕에게서 배웠다.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교유한 성리학자이자 애민정신을 실천한 경세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해 500주기를 맞아 재조명된 토정 이지함 선생의 표준 영정.

아버지와 장인, 친구의 사화(조선 시대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던 일) 연루와 유배로 주류 사회에 흥미를 잃고, 쇠솥을 머리에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김삿갓식 유랑생활을 선택했을 뿐이다. 소금과 바가지를 팔아 백성을 구제한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영국의 애덤 스미스보다 먼저 ‘국부론’을 주창했다. 광산과 염전 개발, 걸인청 개청, 해외 통상론을 임금에게 상소한 개혁주의자였다.

율곡 이이는 토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답했다. 마포 토정에 직접 찾아와 얘기를 나눈 뒤 인품과 학식에 감명받은 남명 조식은 토정을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동방의 한 선비’로 칭송했다. 우암 송시열은 토정을 이이, 성혼과 함께 3명의 스승 중 1명으로 꼽았다. 그래도 토정 이지함을 한낱 역학자라고 폄하할 텐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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