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동 계곡 사이 물과 돌다리, 풍경을 이루다

종로구에 남아 있는 옛 비경들

등록 : 2018-05-31 14:30

크게 작게

바위에 새긴 ‘동천’ ‘동문’ 등 석각

글자 따라가다보면 멋진 옛 풍경

안평대군, 흥선대원군, 김정희 등 흔적

수성동 계곡

‘동천’(洞天)의 뜻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동문(洞門)이라고 했다. 옛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洞門’(○○동문) ‘○○洞天’(○○동천) ‘○○洞’(○○동) 등 각자(새긴 글자)를 찾아 종로구에 남아 있는 오래된 풍경의 흔적 속으로 들어간다.

수성동 계곡과 월암동 각자

서울시교육청 앞을 지나 갈림길에서 직진하다보면 오른쪽에 바위 절벽이 나온다. 그곳에 ‘月巖洞’(월암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월암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나온다. 도성 서문 밖에 사는 여인에 대한 기록 중 ‘월암(月巖)의 오두막집 앞에다 문을 만들고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달도록 명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도성 서문 밖 ‘월암’은 이 바위에 새겨진 것밖에 없다.


‘월암동’(月巖洞) 각자 주변에 딜쿠샤와 권율장군 집터,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임진왜란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 장군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 뒤에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 때문에 마을 이름이 ‘행촌동’이 됐다고 한다.

권율 장군 집터 앞에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딜쿠샤가 보인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지은 집이다. 건물 한쪽 아랫부분에 ‘딜쿠샤’라고 새겨져 있다. 앨버트 테일러는 언론인이었는데 1919년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1942년 일제에 추방당했다. 1948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 땅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에 따라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딜쿠샤와 권율 장군 집터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1㎞ 정도 되는 곳에 수성동 계곡(수성동 계곡을 ‘옥류동천’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거대한 바위와 바위 사이로 흐르는 풍경이 압권이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은 그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에 계곡에 놓인 작은 돌다리가 보인다. 세종 임금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별장 비해당(匪懈堂) 앞에 있던 기린교라 짐작한다.

안평대군은 당대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비해당이 있던 수성동 계곡의 풍경에서 동백, 대나무, 만년송, 난초, 작약과 장미, 모란과 살구, 노루와 꽃비둘기, 떠오르는 달과 원추리, 종소리 등 48가지의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한다.

수성동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던 날, 바위 언덕에 자란 소나무 옆으로 떠오른 초승달을 보았다.

월암동 각자 근처에 있는 한양도성

삼계동과 청계동천

청운초등학교 뒤 청운현대아파트 부근에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또한 인왕산이 만든 수려한 풍경에 남긴 글자다.

부암동주민센터 골목에 안평대군이 머물렀던 무계정사 터가 있다.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추정하는 ‘武溪洞’(무계동)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임을 알려준다(이곳은 현재 개인 소유 땅이다).

무계정사 터 아래에 소설 <빈처>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이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푯돌 위로 올라가면 녹색 철책 안 숲 바위에 새겨진 ‘靑溪洞天’(청계동천)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부암동주민센터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석파정서울미술관이 나온다. 미술관 위에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이 있다(석파정은 미술관을 통해 가야 한다. 석파정과 미술관 관람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석파정 안에 ‘三溪洞’(삼계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삼계동이라는 이름은 별장 주변에 세 갈래의 물줄기가 흘러서 붙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조선 후기 문신인 김흥근의 별장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별장을 차지하면서 별장 주변에 펼쳐진 바위 풍경을 보고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라고 하고, 집 이름도 석파정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석파정 건물 앞 너럭바위에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각자가 있다. 계곡의 물과 구름이 산과 어울린 풍경을 나타낸 것이다. 숲 계곡에 있는 정자 석파정, 커다란 바위절벽(코끼리바위), 600년이 넘었다는 소나무 등도 볼 수 있다.

백석동천과 삼청동문

백사실 계곡 별서 터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자하슈퍼를 지나 조금 더 가면 길 오른쪽 골목 입구에 ‘佛岩’(불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바위를 지나 골목으로 올라가는데 너럭바위 위로 물이 흐른다. ‘白石洞天’(백석동천) 백사실 계곡 나들목이다. 더 올라가면 작은 폭포 2개가 보인다. 폭포 위에 ‘현통사’라는 절이 있다.

절 옆 너럭바위를 건너 숲길로 들어간다. 오솔길 옆으로 졸졸거리며 물이 흐른다. 인공적으로 꾸며놓은 연못이 있고 연못 옆에는 기둥을 받쳤을 것 같은 주춧돌이 땅에 박혀 있다. 조선시대 백사 이항복의 별서 터로 추정했던 곳인데, 그것을 확인할 문헌 기록이 없어 하나의 설로 전해왔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추사 김정희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 자료를 확인했다고 발표한 뒤로 김정희 별서 터로 알려졌다.

별서 터 서쪽 산에 ‘月岩’(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숲이 우거져 글자가 잘 안 보인다. 월암 위로 달이 뜨면 별서 터에 있는 연못에 달빛이 비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악산(북악산)에는 ‘삼청동천’이란 이름이 붙은 계곡도 있었다. 삼청동천은 현재 삼청동 도로와 상가에 묻혔지만 삼청공원 북쪽 계곡과 ‘복정우물’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삼청동 국무총리공관 맞은편 바위에 ‘三淸洞門’(삼청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는데, 건물과 가로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삼청동문’이란 삼청동천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뜻이다. ‘삼청’(三淸)이라는 이름은 도교의 삼청(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 세 궁궐)이 있었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산과 물이 맑고 인심도 좋다는 뜻에서 ‘삼청’이라 했다고도 한다.

백석동천 각자

조선시대 계곡 출입을 금지했을 때, 삼청동 계곡에서 목욕하던 아이들과 사대부집 여자들이 단속에 걸렸다. 아이들은 훈방됐다. 사대부집 여자들이 단속에 걸렸을 때는 그 책임을 가정을 소홀히 돌본 가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삼청동과 화동 접경 지역에 조선시대 궁중 전용 우물인 복정우물이 있다. 옛 이름은 ‘복줏물’이었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짓고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우물을 지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일반인들은 우물을 쓰지 못했다. 다만 정월대보름 하루만 일반인들이 샘물을 떠갈 수 있게 했다. 한동안 묻혀 있던 우물을 근래에 복원했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