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먹어도 인생의 맛이 나는 ‘국수’

여행작가 장태동이 추천하는 국숫집

등록 : 2018-05-1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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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생일 때, 오래 살라고

결혼 때, 국수 타래처럼 잘 살라고

힘들 때, 국수나 해먹자

성북동 ‘구포국수’ 멸치국수.

국수, 돌아보니 인생 곳곳에서 참 큰일 했다. 태어나 첫 생일, 오래 살라고 엄마는 국수를 삶았다. 배필 만나 화촉 밝히던 날, 국수 타래처럼 엉켜 함께 잘 살라고 국수를 끓였다. 이런 날이 아니더라도 이러구러 살면서 밥 넘기기 힘들 때마다 한마디, “국수나 해먹자!” 세상의 모든 국수가 고맙다.

잔치국수

광주리 이고 양동이 들고 논둑길로 들어서는 아주머니가 반가웠다. 새참이다. 잠시 일손을 접고 논둑에 앉는다. 아주머니는 광주리를 덮은 보자기를 걷고 국수 타래를 사발에 담는다. 양동이에 담아 온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어 흙투성이 무릎 앞에 일일이 놓아준다. 채 썬 달걀 지단, 채 썰어 볶은 애호박·당근·양파, 색색의 고명만 봐도 마음이 풍성해진다. 찰랑거리는 육수와 하얀 국수 타래, 그 위에 얹은 고명, 김 가루와 깨소금까지, 한 사발에 담긴 국수가 잔치다.


결혼잔치 때 빠지지 않는 음식 중 하나가 국수다. 마당에 천막 치고 잔치를 벌이던 시절부터 결혼식장 뷔페식 피로연장에서도 국수는 빠지지 않는다.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생일잔치 때에도 오래 살라고 국수를 삶았다. 돌잔치 뷔페 한쪽에도 어김없이 국수는 있다. 잔치국수, 이름 참 잘 지었다. 그 이름으로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 속을 달래주는 행복한 한 끼, 잔치국수 한 그릇 먹어보자.

체부동 ‘체부동 잔칫집’ 비빔국수.

종로구 체부동 ‘체부동 잔칫집’에 잔치국수가 있다. 식당 이름이 잔칫집이다. 자리를 메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잔칫집 같다. 식사 때면 줄 서서 기다리기 일쑤다. 동작구 본동에 ‘소문난 잔치국수’집 잔치국수도 인기다. 멸치육수 맛이 진하다. 한강대교 남단 상도터널로 진입하는 도로 옆 주택가 초입에 있는데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먹는다. 강서구 방화동 ‘동화마을 잔칫날’은 한 끼 국수에 좋은 뜻을 담았다. 수익금으로 어르신들 일자리를 만들고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게다가 잔치국수와 비빔국수는 무한리필이다. 잔치 같은 국수로 잔치를 벌이는 셈이다.

방화동 ‘동화마을 잔칫날’ 잔치국수.

멸치국수 그리고 비빔국수

멸치국수도 있다. 멸치국수라는 이름은 멸치를 기본으로 육수를 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시중에서 파는 잔치국수와 멸치국수는 이름만 다르고 맛은 비슷하다.

노원구 공릉동 태릉입구역 1번 출구 앞에 ‘공릉동 국수거리’를 알리는 간판이 서 있다. ‘공릉동 국수거리’ 도로 양쪽 옆에 국숫집이 띄엄띄엄 보인다. 그 거리에서 ‘소문난 멸치국수’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멸치육수 맛이 은근하게 퍼진다. 동작구 본동의 ‘소문난 잔치국수’집 잔치국수보다 멸치육수 향이 옅다. 대파를 간장에 넣은 양념장을 얹어 먹는다.

성북구 성북동 ‘구포국수’집에도 멸치국수가 있다. 국수를 직접 뽑아 말려서 파는 동네가 몇 곳 있는데, 그중 부산 ‘구포국수’와 충남 ‘예산국수’가 유명하다. 성북동 ‘구포국수’집은 경남 김해 특산인 구포국수로 만든다. 육수와 고명은 가게에서 직접 만든다. 이 집은 국수와 고명을 그릇에 먼저 담고, 주전자에 담긴 뜨끈한 육수를 손님 식탁에서 부어준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국수 그릇으로 떨어지는 육수에 결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구수한 냄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국수 타래 풀어지듯 마음도 풀어진다.

중구 명동에서 1958년부터 국수를 말아내고 있는 ‘명동할머니국수집’ 메뉴에 ‘할머니국수’라는 게 있다. 멸치 향이 옅은 멸칫국물이다. 두부를 고명으로 얹은 국수 이름은 ‘두부국수’다. 간간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양념장을 넣어 먹는 편이 낫다. 1958년에 문을 열었으니까 한국전쟁 이후 명동을 오가던 사람들의 주린 배와 쓰린 속을 풀어주던 국수였을 것이다.

멸치국수나 잔치국수가 새참 또는 점심 끼니가 되는 ‘낮 음식’이라면 비빔국수는 밤과 더 잘 어울리는 밤참에 가깝다. ‘체부동 잔칫집’과 동작구 흑석동 ‘수목식당’ 비빔국수 맛이 기억에 남는다.

칼국수와 계절국수

국수계의 또 다른 큰 맥은 칼국수다. 칼국수는 집에서 자주 해먹는 음식 중 하나였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밀고 펴서 잘라 칼국수 면을 만든다. 사골육수는커녕 멸치육수도 귀한 시절, 맹물에 칼국수를 끓였다. 어떤 날은 담장 아래 호박 넝쿨에서 호박을 따서 채 썰어넣고, 어떤 날은 찬장에 있는 김치를 꺼내 함께 끓였다. 보통 간장양념장으로 간을 했지만, 고추장을 넣을 때도 있었다. 경북 일부와 충북 중·북부 지방에서는 그 이름을 ‘누른국’이라고 했다. 그에 비하면 요즘 국숫집에서 파는 칼국수는 화려하다.

종로3가역 뒷골목에는 약 50m 거리를 두고 칼국수의 양대 산맥인 해물칼국수와 멸치육수칼국수를 파는 두 집이 있다. 1965년에 문을 연 ‘찬양집’에서 해물칼국수를 판다. 멸치육수 칼국수를 파는 집은 ‘종로할머니칼국수’집이다.

돈의동 ‘찬양집’ 해물칼국수.

‘찬양집’ 해물칼국수는 홍합·바지락·생새우로 낸 국물이다. 바지락과 홍합 껍데기를 건져놓을 작은 바가지가 식탁에 함께 오른다. ‘종로할머니칼국수’집 칼국수는 멸치육수 향이 구수하다. 수제비와 감자가 들어간다. 공식적으로는 1988년부터 시작했는데 지금 주인아주머니의 어머니가 동대문에서 잔치국수를 말아내던 시절까지 올라가면 역사는 더 깊어진다.

동작구 흑석동 ‘동해칼국수’는 굴이 들어간 칼국수를 판다. 국수에 굴 향이 퍼진다. 기호에 따라 후추, 파와 고추, 고춧가루를 넣은 간장양념장을 넣는다. 양념장이 굴의 독특한 맛에서 우러난 느끼함을 잡아준다. 1966년에 문을 연 중구 명동의 ‘명동교자’ 칼국수는 닭고기육수로 만든다. 중국식 만두인 완탕 네 개가 국수에 올라간다. 양념이 진한 김치가 국수 맛과 잘 어울린다.

명동 ‘명동교자’ 칼국수.

영등포구 문래동 ‘영일분식’ 비빔칼국수는 칼국수계의 색다른 매력이다. 불에서 여러 재료를 섞어 볶아내는 볶음칼국수가 한때 사대문 안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영일분식 비빔칼국수는 약 50년 전부터 문래동에서 그 맛이 전파되고 있었다. ‘○○정밀, ○○공업사, ○○철강, ○○밴딩’ 등의 간판을 내건, 크고 작은 철공소들이 밀집한 동네에서 노동자들의 한 끼를 책임지던 음식이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지금은 일부러 찾는 사람도 많다.

이른바 ‘계절국수’도 있다. 동작구 본동 ‘소문난 잔치국수’집은 콩국수를 벌써 시작했다. 열무국수도 계절을 탄다. 종로1가의 ‘미진’은 사계절 메밀국수를 팔고 있지만, 역시 더운 날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 맛이 좋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유명한 생선국수도 보라매역 주변 골목, 문래동 골목 등 서울의 몇몇 골목에 둥지를 튼 국숫집에서 맛볼 수 있다. 여름 냇가의 물비린내와 흙냄새를 품은 생선국수는 여름 천렵의 추억이기도 하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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