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남영동 스테이크 붐을 지핀 원조집이자 부대찌개의 명가

부대고기집 ‘황해(집)’ since1973

등록 : 2018-04-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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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최성국의 고향 따서 옥호 지어

부인 정순자씨가 시장통 부대고기집

성황인 것을 보고 개업, 대박 나

미군 부대 존재와 함께 생성된 음식

부대고기집의 터줏대감

웰빙 바람과 용산 미군 기지 이전으로

부대고기집 쇠락, 골목 4~5집만 명맥

부대고기집 골목 사라진다고 해도


버젓한 한국 음식으로 남을 듯

황해집은 남영동 스테이크 골목의 몇 남지 않은 부대고기집의 하나다. 오른 전세금 때문에 고민하던 세탁소 안주인 정순자씨가 근처 시장통에서 소시지, 햄 등을 구워 팔던 간이식당이 장사가 잘되는 것을 보고 가게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등심과 안심이 같이 붙어 있는 티본 부위를 불판에 구워 판 것이 대히트를 하면서 남영동 부대고기집 붐을 선도했다. 지금도 주방의 모습은 초창기 식당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쌀국수는 동남아시아 전통 음식이지만, ‘베트남 쌀국수’는 프랑스 식민 지배의 산물이다. 베트남 북부지역의 전통 쌀국수에 프랑스식 조리법이 더해진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겨 먹는 베트남 쌀국수다. 쌀국수를 뜻하는 베트남어 ‘포’(Pho)는 프랑스 스프 ‘포토푀’(pot-au-feu)에 어원을 두고 있다.(<음식잡학사전>, 윤덕노)

외세 침탈과 국토 분단의 역사를 공유한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식이 적지 않다. 임오군란(1882)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산둥성 상인들이 먹던 ‘자장면’(炸醬麵)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것이 짜장면이다. 김밥과 어묵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데카마키’(김초밥)와 ‘오뎅’의 영향을 받아 한국인들도 즐겨 먹는 간편 음식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전통과 외래가 섞여 새로운 맛이 탄생하는 게 인류 보편의 음식 역사라면, 16개국 군인(유엔군)이 참전하고 수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게 된 남한에서는 어떤 음식이 태어났나? 6·25라는 전대미문의 국제전쟁은 부대찌개라는 희한한 혼종 음식을 낳았다. 김치를 넣어 끓이면 김치찌개이듯 부대찌개는 ‘부대고기’를 넣어 끓인 찌개다. 이때의 부대고기는 ‘미군들이 먹는 고기’다. 미군 기지에 의존해 살던 한국인들이 ‘미군 부대에서 반출된 고기류와 소시지, 햄, 베이컨 같은 미제 가공육’을 총칭한 말이었다. ‘부대고기집’ 은 이런 미군용 고기와 가공육을 굽거나 찌개로 끓여 파는 식당을 일컬었다.

#부대고기집은 미군이 주둔한 곳이면 어디서나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다. 경기도 의정부와 송탄은 부대찌개의 대표 지역으로 유명했다. 부대찌개가 본격적으로 대중화하기 전의 서울에서는 버터 바른 불판에 부대고기를 지글지글 구워내는 이른바 ‘남영동 스테이크’의 명성이 자자했다. 전성기인 70년대 말에는 남영동 골목 안에만 30곳이 넘는 부대고기집이 밀집할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다. 그러나 강남 개발과 80년대 3저 호황으로 외식산업이 다양화되고, 먹거리도 풍성해지면서 점차 퇴조하기 시작해, 지금은 4~5곳만이 부대고기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서울시는 이런 ‘남영동 스테이크’의 문화사적 가치를 인식해, 용산구 남영동 부대고기 골목 안의 전문식당 ‘황해(집)’(대표 최성국)를 “보호할 가치가 있는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1973년 문을 연 황해는 남영동 스테이크 붐을 일으킨 원조집이자, 45년째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초창기 황해의 대표메뉴인 ‘티(T)본 스테이크’는 특히 명물로 꼽혔고, 88올림픽 이후에는 깔끔한 맛의 부대찌개로 명성을 이어갔다.

#황해의 주인은 최성국(77) 정순자(75) 부부이다. 황해라는 옥호는 최성국의 고향 황해도에서 따왔다. 1·4후퇴 때 최성국의 가족은 “길바닥에 깔린 시쳇더미를 밟으며” 피난을 해 전남 진도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삼 남매가 겨우 살아남았다. 진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할 일도, 먹을 것도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17~18살 무렵 섬을 떠났다. 1960년 서울에 정착해 세탁소 종업원으로 살았다. 경남 진주에서 서울로 와 남영동에 뿌리내린 정순자는 22살 무렵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세탁소 총각의 끈기에 밀려 1965년 그와 결혼한다. 부부는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삼 남매를 낳고 살았다. 변화는 오른 전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이사를 고민하게 된 1973년에 시작됐다.

황해집 주인 최성국씨와 정순자씨 부부. 30대 초반에 황해집을 연 뒤 45년째 가게를 하고 있다.

정순자는 근처 시장통에 무척 장사가 잘되는 식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마늘가루와 후추를 뿌린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을 철판에 굽는 정도였는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가며 사먹고 있었다. 이런 식당이 드물었던 것은, 부대고기를 밀반출에 의존했기에 공급받기 안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업의 요체를 간파한 정순자는 남편의 우려를 무릅쓰고 ‘달라 빚’까지 내어 부대고기집을 차린다. “세탁일은 지겨워도 음식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정순자는 자기만의 소스를 개발해 맛의 차별성을 기하고, 주메뉴로 티본 스테이크를 내세웠다. 양은 적어도 등심과 안심을 같이 먹을 수 있는 ‘황해집 티본스테이크’는 금세 대박이 났다. 문을 열고 한 달 남짓 만에 빚을 모두 갚을 정도였다. 황해의 성공은 남영동 골목에 부대고기 바람을 일으켰다. 식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지만, 그만큼 손님도 쇄도했다. 어느 집이든 고기 공급이 달릴까를 걱정할 뿐, 손님이 없어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고급 관리들, 장성들은 물론이고 연예인들도 줄을 이었다. 청와대? 대통령 빼고 다 왔다.”

황해 부대찌개는 여러 음식을 먹어보며 맛을 연구한 주인아주머니의 노력이 배어 있어 국물맛이 담백하고 시원하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현재 황해의 메뉴는 모둠구이와 부대찌개다. 티본스테이크는 미국산 뼈 있는 쇠고기 수입이 금지되면서 메뉴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같은 방법으로 등심을 굽는다. 모둠구이는 불판에 포일을 깔고 버터 덩어리를 녹인 다음 냉동 소고기와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을 버섯, 양파, 감자 등과 함께 굽는다. 적당히 익힌 다음 이 집만의 비밀인 짙은 갈색 소스를 듬뿍 뿌려 고기에 간이 배도록 한다. 고기를 찍어 먹는 소스는 미제 우스터셔와 간장을 섞었는데 전체적으로 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기는 약간 질긴 느낌인 대신, ‘미제’ 가공육은 소스 맛과 잘 어울린다. 고기와 버섯 등은 역시 미국산 베이크드 빈스(토마토소스에 조린 콩)를 얹은 양배추와 고춧가루·간장으로 버무린 부추·양배추무침 등을 곁들여 먹으면 좋다. 부대고기 구이는 바비큐만 알던 미군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한국 사람 하나 없이 미군들로만 가게가 다 차는 날도 허다했다. 이 친구들은 부대고기를 최고의 맥주 안주로 쳤다.”

황해집의 부대고기 모둠구이는 미국산 냉동 소고기와 소시지, 햄, 베이컨을 감자, 양파, 버섯 등과 함께 불판에 굽는 요리다.

황해의 부대찌개는 기름기 없는 시원한 맛이 특징이다. 국물이 짜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육수를 쓰지 않고, ‘민치’(간 고기의 일본말. 영어 ‘mince’(민스)가 어원이다)를 넣어 맛을 조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대고기의 기름진 맛을 잡기 위해 짧은 콩나물을 넣는 것도 차이점이다. 기름기와 짠맛을 덜기 위해 베이컨을 넣지 않고, 소시지도 삶은 것을 쓴다.

“서양 손님들 가운데도 해장 음식으로 부대찌개를 좋아하는 이가 많았지만, 일본 손님들이 가장 좋아했다. 일본에 가서 부대찌개 식당을 차리자고 졸라댄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서 부대찌개가 ‘인기 음식’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88올핌픽 전후로 본다. 황해에서 부대찌개가 주메뉴로 등장한 것도 90년대 초반이다.

부대찌개는 미군 부대 잔반이나 남은 식재료를 사용해 끓였다는 ‘꿀꿀이죽’ ‘유엔탕’의 소문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의정부 ‘오뎅식당’ 등이 지금의 부대찌개 원형이 되는 메뉴를 개발하면서 의정부, 송탄 등 미군 부대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부대찌개 대중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88올림픽 개최를 위한 외국산 식재료 수입 완화와 국산 가공육 기술의 발달이었다. 그전까지 국산 가공육은 생선살과 전분을 섞은 것이어서 찌개를 끓일 수 없었다. 국산 소시지와 햄의 등장은 많은 식당이 미군 부대에 의존하지 않고도 양질의 부대찌개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존슨탕’ 같은 부대찌개 이름이 이 무렵에 등장한 것은 국산 ‘깡통’(햄)이 아닌 ‘미제’ 부대고기로 만든 정통(?) 부대찌개를 강조하기 위한 차별화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번 돈을 다 세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날도 많았다”는 황해의 영화도 저물어가고 있다. 미제의 우월성이 지배하던 시대는 벌써 지났고, 기름기 많고 살찌는 고단백 음식을 기피하는 웰빙 시대를 거치면서 황해를 비롯한 부대고기집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는지 모른다. 팔순을 앞둔 주인 노부부도 자식들의 가업 승계에 큰 관심이 없다. “자기 사업과 직업이 있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힘든 부대고기 식당을 대물림하지 않겠다” 한다. 남편 최씨의 건강을 고려하면 “길어야 2~3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지난 반세기 가까이 의지해온 미군 부대가 떠난다”는 사실이다. 미군이 평택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평화공원이 들어서는 재개발의 시기를 지난 뒤에도 남영동 부대고기집들이 여전히 문을 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대고기 골목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전쟁을 매개로 탄생한 ‘이상한 음식’, 부대찌개는 이미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 음식이 되어 있다. 베트남 쌀국수처럼 반세기쯤 뒤에는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코리언 푸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오늘 2018년 4월27일은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6·25 종전 논의를 시작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사람처럼 음식에도 영혼이 있다면 부대찌개인들 어찌 감회가 없으랴. 오늘 같은 날은 부대찌개와 더불어 소주를 마시며 그 뉴스를 듣고 또 들어도 좋으리.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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