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장소인문학의 보고…조선 문제적 인물 송시열의 집터

우암구기(尤庵舊基)

등록 : 2018-02-01 15:05 수정 : 2018-02-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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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잠저, 흥덕사 터 거쳐

우암의 서울집, 지금은 서울과학고

서론과 노론의 영수로 영화 누리다

83살에 사약 받은 시대의 파탄자

집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

푯돌 100m 위로 ‘증주벽립’ 바위 각자

주자 사상 계승 의미, 우암 친필

사후 바위 아래 서울서 가장 큰 서당


서울 종로구 명륜1가 5-99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옛 집터에 있던 바위에 우암의 친필이 새겨져 있고, 바위를 축대로 빌라가 서 있다. 이 바위 각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이다.

서울 종로구 명륜1가 5-99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 옛 집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소인문학의 지문(땅의 무늬)이 얽히고설킨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였고, 불교 교종의 총본산인 흥덕사를 거쳐, 우암의 서울집이 되었다. 관운장을 모시는 북관왕묘가 깃들었으며, 동국대학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혜화전문대학 자리였다. 보성고에 이어 지금은 서울과학고의 요람이다.

이 동네의 대표 이미지는 오늘날 대학천을 이루는 흥덕동천의 원류인 쌍계동천(雙溪洞天)과 흥덕상화(興德賞花)이다. 조선 시대 서울 인문지리지 <한경지략>과 월산대군·강희맹·서거정의 시 구절 속 흥덕동 꽃구경에는 연꽃과 앵두꽃이 빠지지 않는다. 도성 내 다섯 곳 절경과 열 곳 명승지로 꼽힐 만큼 경관이 뛰어나 놀이객이 북적대던 곳이었다.

송동(宋洞)은 한성부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속했다. 송동은 송시열이 산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혜화동으로 지명이 변경됐다. 명륜동이라는 지명은 1936년 2차 동명 개정 때 조선총독부 소속 유학교육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네라고 하여 붙은 왜색 지명이다. 동숭동 또한 숭교방 동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흥덕동, 송동, 잣동, 흙다리, 앵두나무골, 박우물골 같은 정겨운 우리 지명은 사라졌다.

우암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좋게 말하면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에 배향된 한국을 대표하는 18명의 대학자 중 한 명이고, 종묘 공신당에 배향된 조선의 대표적 정치가·관료 83명 중 한 명이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급의 걸출한 선비이자, 효종의 총신이라는 뜻이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광영을 누렸지만 83세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란 죄목을 받고, 사약을 받은 시대의 파탄자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넘게 이름이 언급된 당쟁사의 대명사였다. 승자의 역사라고 했던가? 노론은 부활해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일당지배했다. 그의 제자들은 우암을 공자·맹자·증자·주자 반열에 놓고 송자라고 칭했다. 그는 전설이 됐고, 신격화됐다.

송시열 집터 표시는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우암구기’ 터, ‘증주벽립’ 바위 각자(새긴 글자) 터 등 세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 푯돌은 없어지고, 바위 각자 앞에 팻말을 새로 세웠다. 우암의 집터는 현재 수백 채의 주택과 학교가 들어선,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번지수만 알면 찾아갈 수 있는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이 보급되기 전에는 집터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답사객은 골목을 뺑뺑 돌다가 포기하기 일쑤였다.

송시열 집터처럼 장소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데다, 바위 각자 외에는 앞뒤 역사의 흔적이 멸실됐을 때가 문제다. 이성계 잠저나 흥덕사, 북묘(관우의 영을 모신 서울의 네 사당 중 북쪽에 있던 사당), 불교중앙학림의 흔적이 전무하므로 푯돌을 어디에, 어떻게 세울지 헛갈린다. 마땅한 장소를 정하기도 어렵지만, 찾아가는 사람은 더 어지럽다. 골목 구석진 곳에 불청객처럼 초라하게 서 있는 푯돌은 바라보기도 민망하다. 차라리 적당한 장소를 구해서 동네를 관통하는 스토리와 더불어 개별적인 유적의 위치도와 해설판을 세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서 혜화동로터리를 반쯤 돌아 혜화동주민센터와 혜화초등학교 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앞을 막는다. 좌회전하면 성균관대학과 서울국제고가 나오고, 우회전하면 서울과학고와 경신중·고교를 만난다.

‘우암구기’로 가려면 ‘아이들극장’을 끼고 혜명가압장을 따라 난 좁은 길로 들어서야 한다. 흥덕사 터 푯돌과 하마비가 전봇대 두 개를 가운데 두고 떨어져 있다. 몇 년 전 찍은 사진에는 분명히 두 석물이 나란히 붙어 있었건만 어느새 전봇대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누군가 푯돌을 제멋대로 옮기는 모양이다.

왼쪽으로 꺾어지면 제법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진다. 높다란 축대 위에 앉은 빌라와 주택이 시야를 가리는 골목길을 오르면 훼밀리빌라 주차장 옆 초소건물 한구석에 ‘尤庵舊基’(우암구기)라고 적힌 작은 푯돌이 놓여 있다. 바로 그 푯돌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딱한 행색이다. 전문가들은 이곳을 우암의 옛 집터 어귀라고 본다.

이 푯돌에서 5, 6층짜리 빌라 4채를 지나 100m쯤 올라가야 빌라 축대 아래 묻힌 ‘曾朱壁立’(증주벽립) 바위 각자와 서울시가 세운 ‘우암 송시열 집터’ 팻말을 만날 수 있다. 우암빌라 앞, 방산빌라 아래다. ‘우암구기’에서 바위벽까지 전체가 우암의 집이었던 셈이다. 언급했다시피 본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에 있던 푯돌은 바위 각자 앞 팻말과 통합됐다.

바위를 축대로 쓴 빌라가 들어서기 전 옛 우암집 뒤 바윗돌 모습.

바위 각자는 우암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유학자인 증자와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자의 사상을 계승해 흔들리지 않는 벽처럼 우뚝 서겠다는 신념을 나타냈다. ‘유학’을 ‘유교’로 만든 우암의 고집이기도 하다. 1984년 7월5일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각자 바위를 축대로 삼아 서 있는 방산빌라 3동을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바위 각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승정원일기> 등에 우암 사후 성균관 말단관원 정학수(또는 정조윤)가 송동 바위 아래 서울에서 가장 큰 서당을 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북묘가 생기기 전까지 학맥이 이어진 것이다. 또 제주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五賢壇)에도 똑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송시열 등 다섯 분을 배향했는데 제주로 유배 온 우암을 기리고자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새겨넣은 것이다.

옛 송동 뒷동산에 새겨진 우암의 또 다른 바위 각자를 보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우암구기와 증주벽립 각자를 뒤로하고 언덕을 계속 오르면 ‘혜화그린빌’이 나오는데, 한양도성으로 나가는 샛길이 있다. 올라가면 국제고가 나오고 내려가면 과학고 길이다.

바위 각자는 과학고 교내 우암관 앞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 천하절경 뒷동산은 학교 내 작은 둔덕으로 변해 있었다. 학교에서 세운 천재암(千載巖·천년바위) 안내 푯돌 뒤 큰 바위에 ‘今古一般’(금고일반·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란 글씨가 비교적 또렷하고, 아래쪽 절벽가 작은 바위에 ‘詠磐’(영반·시를 읊는 바위)이란 각자는 흐릿하다.

우암 글씨가 새겨진 ‘천년바위’ 푯돌.

320여 년 전 우암은 집 뒤 절벽에 주자학을 향한 굳은 신념을 새기고, 뒷동산 천년바위에도 변함없는 마음을 투영했다. 과연 그럴까? 건물의 이름은 송시열의 호를 따서 우암관이라고 지었으나 주위 환경은 딴판이다. 졸업생들이 기증한 ‘창조의 터’ 기념조형물이 천년바위를 가리고, 노비 출신으로 조선의 발명왕이 된 장영실상이 천년바위를 주시하며 우뚝 서 있을 뿐이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l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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