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서촌의 정신적 고향…그 흔적은 미스터리

서촌 송석원 터

등록 : 2018-01-18 14:09 수정 : 2018-02-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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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훈장 천수경의 집 이름

중인 13명과 함께 시모임 결성

흥선대원군과 김정희도 출입

김홍도 그림, 김정희의 글씨로 남아

매국노 윤덕영이 그 자리에

3층 프랑스풍 건물 벽수산장 지어

800평 규모, 한양 아방궁으로 불려

김정희 글씨 새겨진 바위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

‘한양 아방궁’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로 지은 돌계단 위 한옥이 옛 송석원 터를 증언해준다. 한옥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복원돼 있다.

송석원(松石園) 터 푯돌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3번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전봇대 옆 좁은 보도 위에 있다. 통인시장 후문 앞 정자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GS리더십센터 쪽으로 좀 걸어 올라가다 보면 인왕부동산과 국시한그릇이 나오는데 바로 그 앞이다. 외진 곳인데다 푯돌의 전면부가 보도를 향해 있어서 큰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역사지식이나 서울지리에 능한 사람이 아니면 푯돌만 보고는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동네 꼬마를 붙잡고 물어보니 “송석원…? 몰라요. 수송동 계곡은 알아요”란 대답이 돌아온다.

역사란 생성도 쉽지 않지만 제대로 전승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오늘의 서촌이나 옥인동이라는 동네가 생기기도 전에 위명을 떨쳤던 송석원이 이제는 한갓진 이야깃거리가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서울의 산하에서 송석원처럼 드라마틱한 장소는 흔치 않다. 서울을 지탱하는 4개의 산 가운데 우백호, 서산에 속하는 인왕산의 본류가 옥류천이었다. 계곡 이름에서 옥류동이라는 지명이 나왔고,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억지로 합성해서 만든 지명이 오늘의 옥인동이다.

송석원은 인왕산과 옥류천의 대명사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족 전용 세거지였고, 이후 세도가의 별장지대였다가, 선비도 아닌 중인 신분으로 시를 쓰는 별난 서리, 아전들의 본거지가 됐다. 건축 당시 대궐보다 크고 화려한 ‘한양 아방궁’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필지가 분할되기 전까지도 ‘송석원인왕산 아랫동네’를 지칭했다.

뜸 그만 들이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송석원은 서당 훈장 천수경(1758~1818)이 살던 집 이름이다. 송석도인(松石道人)이란 호에서 비롯됐다. 한낱 서당훈장의 아호와 당호가 역사가 된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가난하지만 독서를 즐겼고, 인품 있고, 글솜씨가 출중한 시인은 정조10년(1786) 7월 장혼, 임득명, 김낙서 등 중인 13명과 함께 시모임을 결성해 3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문인 사대부를 포함해 당대 선비들은 모임과 백일장에 초청받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이 모임을 ‘송석원 시사’ 혹은 옥계시사라고 일렀다. ‘옥계청유첩’ ‘옥계십경첩’ ‘풍요속선’ 등 문집에 그림과 시편이 전한다.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이나 추사 김정희도 함께 어울렸다.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는 1791년 유둣날 낮 송석원 시사의 낮 모임을 그렸다. 옥류천 하류 초입 풍경이며 바위 절벽 아래 ‘송석원’(松石園)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오늘의 박노수미술관 어림으로 추정된다.

송석원은 당대 최고이자,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이인문이 남긴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임이 결성된 지 5년이 지난 1791년 음력유월 보름 유둣날 9명이 낮밤으로 두 차례 시회를 열었다. 낮모임은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에, 밤모임은 김홍도의 ‘송석원시사 야연도’에 각각 담겼다. 그림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화서의 두 화원에게 주문 제작했다. 당시 김홍도의 그림 한 폭에 쌀 60섬이었으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그림 두 장 값으로 2000만원을 지불했다는 얘기다.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큰 바위 절벽 아래 한자로 ‘송석원’이라고 세로로 적힌 각자가 선명하다. 바위 각자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바위 각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아예 다른 곳이다. 너럭바위에 갓과 도포를 차려입은 8명이 앉아 있고, 1명이 막 도착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좌정한 이가 천수경으로 보인다.

그림 속 풍경은 과연 어디일까? 지금은 크고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산기슭의 흔적은 사라졌고, 쏟아져 흐르던 옥류천 물길은 수십 갈래 골목길과 사람길로 덮여 자취가 없다. 다만 낮은 옥류천의 하류 초입이요, 밤은 상류 언덕 위라고 추측된다.

전문가들은 김홍도가 그린 밤그림 장소를 옥인동 청휘각 뒤 서울교회쯤으로 추정하는데, 1958년 건립된 이 교회의 이름은 ‘하와이 한인 기독교 독립교회’였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육군공병단을 동원해 지었다고 한다. 교회 종탑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이는 서촌의 풍경이 아스라하다. 이인문의 낮그림 장소는 박노수미술관 어림으로 짐작된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 야연도’는 이인문의 그림과 같은 날 벌어진 시회의 밤 풍경이다. 그림 속 옥류천 상류 언덕 위 너럭바위는 오늘의 옥인동 청휘각 터 옆 서울교회 쯤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이 찍은 사진에 남아 있는 ‘송석원’이라는 바위의 각자는 추사 김정희의 32살(1817년) 때 글씨다. 조선 최고의 화가와 서예가의 작품이 한 장소에 헌정된 유일한 사례라는 점과 함께 송석원 최대의 미스터리는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의 위치에 쏠려 있다.

송석원의 열쇠는 장동 김씨와 여흥 민씨에 이어 해평 윤씨로 대물림됐고, 일제 강점기 윤덕영(1873~1940)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일병탄에 기여한 공으로 자작 칭호를 받고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윤덕영은 순종비 윤씨의 백부이며, 일제 후반기 납세액 순위가 20위 안에 들 정도로 부호였다. 치마폭에 옥새를 감추고 달아나는 조카딸에게서 옥쇄를 빼앗아 열흘 동안 집에 보관했다가 일제에 바친 병탄의 일등공신이다.

윤덕영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싹쓸이한뒤 ‘벽수산장’이라는 프랑스풍의 3층짜리 석조저택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 집을 ‘한양 아방궁’이라고 했다. 대궐을 굽어보는 위치에다 건평이 800평에 달하는 벽수산장은 건축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단일 건물이었다. 뱃놀이가 가능한 200평 정도의 호수도 만들었다.

1910~3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 속 윤덕영의 머리 위에 ‘벽수산장’이라는 거대한 세로 각자가 보이고, 바로 왼쪽에 가로로 ‘송석원’이란 추사 글씨가 흐릿하다. 추사의 각자가 처음 사진에 찍힌 것이다. 윤덕영이 세운 벽수산장이 바로 송석원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1927년 당시 지적도에 따르면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가 윤덕영의 집으로 표기돼 있을 정도이니 사진 속 바위벽이 어디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3번지 길거리에 있는 송석원 터 푯돌.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송석원 각자는 종적을 감췄고, 한국전쟁 이후 필지가 잘게 쪼개져 피난민들의 집이 난마처럼 얽히면서 묘연해졌다. 추측이 무성하지만 이인문의 그림 속 옥류천 하류를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인 박노수미술관으로 본다면, 이 건물 뒤 바위벽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송석원의 기구한 장소 유전은 끝없이 이어졌다. 1966년 벽수산장 본관 보수공사 중 불이나 건물이 전소하다시피 하면서 건물의 수명은 끝났고, 1973년 도로정비사업 중 철거됐다.

윤덕영은 여론의 지탄이 부담스러웠던지 정식으로 입주하지 않고, 중국의 종교단체인 홍만학회의 조선지부 예배당과 사무실로 본채를 임대했다. 해방 후 덕수병원, 조선인민공화국 청사, 미군 장교숙소로 전전하다 1954년부터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이 사용하던 중 불이 난 것이다.

사람들이 서촌 옥인동에 열광하는 이유는 서촌의 정신적 고향, 송석원의 네버앤딩 스토리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 아닐까? 길가에 널브러진 육중한 돌기둥 3개와, 36개 돌계단 위 한옥의 위풍도 범상찮다. 인왕산 아랫동네의 정체성인 송석원 바위 각자를 언젠가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나래를 편다.

이완용 못잖은 매국노 윤덕영은 송석원에서 살지 못했고, 대가 끊긴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는 ‘권선징악&사필귀정’ 스토리는 덤이다. 그러나 생존 현실은 낭만이 아니다. 옥인동은 재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방황 중이다. 도시재생의 마법이 절실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l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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