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도쿄라이프

‘센토’에서 만난 일본 설 풍경

등록 : 2017-01-0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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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이틀째인 2일 오후, 당연히 연초라 손님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오랜만에 딸아이와 함께 일명 ‘센토’라고 하는 일본 대중목욕탕에 갔다. 오차노미즈 역 근처에 있는 목욕탕이었다. 그런데 웬걸, 1층 자동판매기에서 입장료를 사고 ‘프런트’에서 수건을 받아 3층 탈의실에 올라가니 이미 많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 잘못 왔구나’ 하는 순간, 내 번호표 옆 사람들이 옷을 벗을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내어준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역시 일본인답구나’ 하면서 욕탕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앉아서 씻을 수 있는 자리가 적어 아예 빈자리가 날 때까지 수건 한 장을 든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독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빈자리가 나면-아니 빈자리가 아니라 일부러 간단하게 서둘러 씻고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아이들 먼저 앉혀놓고 씻게 했다.

나 역시 빈자리에 앉아 씻다가 10분도 채 안 돼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얼른 비켜주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분명 눈총을 받을 것만 같아 솔직히 자의 반 타의 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양보했다. 모두들 그렇게 빙빙 돌아가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참으로 느끼는 것이 많았다. 맨 처음 느낀 것은 우선 불편함에서 오는 불만이었다. 목욕탕이 좁으면 한도 이상 손님을 입장시키지 말아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불만 백배. 그러다 한 30분 정도 지나니 그 불만에서 “아 이런 목욕 스타일도 있구나” 하는 감탄사로 변하고, 한 시간쯤 지나자 그다음에는 역시 공중도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일본인답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순서를 기다리는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대신 욕탕에 들어가 몸을 덥히면서 그동안의 피로를 푸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은근히 마음 한켠에서는 나도 그 질서의식(?)에 동참했다는 뿌듯함마저 들었다면 너무 ‘오버’인가.

그렇게 욕탕과 따로 앉아 씻는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목욕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완전히 적응돼 ‘뭐 이렇게 서로 어우러져가며 살아가는 거지, 뭐’ 하고 현실 속에 완벽하게 합리화해버린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인들의 목욕에 대한 개념이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목욕은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몸을 씻으러, 즉 때를 미는 것이 아니라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것이 목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의 주택 구조도 한몫한다. 잦은 지진 때문에 한국처럼 기름이나 기타 연료에 의한 난방시설이 어려워 일본인들은 전기나 석유난로로 한겨울을 지내야 한다. 하지만 석유난로 사용은 만약 방을 얻어야 할 경우, 화재 위험 때문에 임대계약 조건 속에 아예 금지조항으로 묶은 지 오래됐고, 전기사용은 전기요금이 만만치 않아 불가피하게 지혜를 짜낸 것이 취침 전 몸을 덥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문학작품 속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집안의 위상에 따라 순서대로 욕조에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덥힌 후 그 온기로 잠을 자는 것이 일본의 일상생활 모습이다.

때문에 웃지 못할 일화도 많다. 일본인 가정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묵게 된 어느 한국인이, 그 집에서 손님 접대로 가장 먼저 욕조를 사용하게 했더니 때를 밀고 그 물을 모두 빼는 바람에, 그날 그 일본인 가족들이 목욕을 하지 못했다더라는 경험담은 숱하다.

이렇듯 정초에 전혀 뜻하지 않은 ‘센토’행으로 평소 볼 수 없었던 일본인들의 소박한 민낯을 봤다. 올해 일본의 설날은 유난히 차분한 가운데,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가게들이 연휴로 문을 닫은 상태에서 오로지 편의점만 환히 불을 밝힌 채 아르바이트 점원이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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