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 자이니치, 아픈 역사 안고 ‘한·일 연대 기록’ 남겨

⑯ 통일의 절 ‘만수사’와 ‘교토해방운동전사의 비’, 그리고 ‘우토로평화기념관’

등록 : 2023-05-25 16:52

크게 작게

일본 육사 시절 박정희도 묵어 갔다는 교토 ‘조선 사찰’ 만수사. “조국이 통일된 뒤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1천여 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다고 한다.

만수사, 해방 전후 ‘교토 한국인 사랑방’

‘조·일 우호친선 만세’ 비석 눈길 끌어

교토 진보·노동운동가들의 추념비엔

자이니치 등 동포들도 11명 합사돼 있어


한일연대 상징 ‘우토로마을 생존권투쟁’

모금과 한국 정부 지원으로 “해피엔딩”


우토로기념관, ‘개관 1년에 1만 명’ 방문

“한일 우정으로 사회 변화시키자” 다짐

교토도 자이니치(在日·재일,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우리 동포들. ‘한국 국적’을 가진 이와 무국적인 ‘조선적’으로 나뉜다)의 역사가 깊다.

한때 인구가 수십만에 달했다. 해방 직전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는 200만 명에 육박했다. 1930년대 이후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징용, 노동이민 등이 인구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인구가 팽창하면서 혐오의 시선도 넓어졌지만,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두 나라 민중의 연대와 우정의 역사도 깊어졌다.

특히 교토는 자유민권사상과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적지 않은 두 나라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이 민족과 ‘적’(籍)을 떠나 ‘동지’가 됐다. ‘5월’을 맞아 교토에 남아 있는 한·일 연대의 자취를 찾아가봤다. 안내서는 정재정 교수(서울시립대)의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2007).

본격적으로 자이니치의 자취를 따라가기 전에 ‘적’에 대해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적’은 1945년 이후 일본이 부여한 출신 지역 분류 표시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사람은 ‘조선적’, 대만에서 온 사람은 ‘대만적’으로 분류했다. 해방 직후 일본에 남은 재일동포는 모두 ‘조선적’이었지만,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민단계 동포는 대부분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북한과의 미수교 상태가 이어지면서 다수의 총련계 동포나 “통일된 뒤 ‘통일 한국·조선’ 국적을 갖겠다”고 생각하는 재일동포는 여전히 ‘조선적’이다. 사실상 무국적 상태인 셈이다.

2005년 일본에서 개봉돼 화제를 모은 영화 <박치기>(감독 이즈쓰 가즈유키)는 이런 자이니치의 역사와 애환을 소재로 한 일본 영화이다. 2006년 한국에서도 개봉된 영화의 전편에는 노래 ‘임진강’이 흐른다. 1957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1966년 그룹 ‘포크 크루세더스’가 불러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 단원 중 한 명이 ‘교토 조선중고급학교’를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다가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남북 분단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당시 활발했던 일본 학생운동권에서 많이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강’은 일본과 북한의 미수교 상태로 인해 공식 미디어에서 사라졌다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야 방송에서 불리는 게 다시 가능해졌다. 그 사이에도 일본 민중운동 현장에서는 이 노래가 애창됐다고 한다.

영화 <박치기>의 무대는 교토 남쪽 히가시쿠조(東九條)다. 옛날부터 교토에서 자이니치가 가장 많이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이 길을 따라 9조대교 다리를 건너면 교토에서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후쿠지(동복사)가 나오는데 그 길목에 만주지(만수사)라는 작은 절이 하나 있다. 도후쿠지 단풍 구경에 나섰다면 만수사도 한 번 살펴보고 가기 바란다(절 내부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해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있다).

절 표지석에는 ‘교토5산 만수선사’라는 절 이름과 ‘재경도조선인불교도귀국기념’(在京都朝鮮人佛敎徒歸國記念)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뒷면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세계의 항구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자 조·일우호친선 만세 난암”이라는 글이 보인다. 1959년에 세웠다는데 ‘조·일우호친선만세’라는 글귀가 특히 이채롭다.

만수사는 일제강점기부터 교토 자이니치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비석을 세운 ‘난암’은 조선 승려 출신으로 일본 임제종 승려가 된 유종묵(柳宗黙. 1893~1983)이다. 3·1운동 참가 뒤 중국·만주 등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출가해 ‘돈오점수’를 설파한 근대 선승인 한암 스님(1876~1951)의 제자가 됐다.

우토로마을 생존권투쟁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우토로평화기념관. 일본 청년학생들의 견학과 방문이 줄을 잇는다.

1935년 통도사의 지원으로 임제종대학인 교토 하나조노대학에서 유학했다. 같은 한암의 제자였던 탄허(1913~1983)는 스승의 비문을 쓰면서 난암을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아 종풍을 떨친 두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이강옥 교수의 한국선 이야기’ 중).

그런 그가 왜 해방 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았는지는 그의 일본 불교 활동, 통일운동 등의 행적으로 피상적인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는 교토 만수사와 도쿄 국평사에 수천 구의 자이니치 유골을 안치하고 “조국이 통일된 뒤” 고향 땅에 묻어줄 것을 다짐했다. 그런 난암이 주지로 있는 만수사에는 많은 자이니치와 한반도에서 온 동포가 모여들었고, 만수사는 일약 교토 재일 커뮤니티의 사랑방 같은 곳이 됐던 것 같다.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에는 일본 육사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교토에 왔을 때 이곳에서 묵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대구사범 시절 이래의 어떤 ‘인맥’이 작용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만수사 방문에 이어 5월14일에는 봄비를 맞으며 ‘기온 야사카신사’ 뒤의 큰절 치온인(지은원)을 찾아갔다. ‘교토해방운동전사 추도제’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전’ 문제 때문인지 ‘관계자’ 외에는 행사장 입장이 허용되지 않아 유감이었다. 행사 참관을 포기하고 치온인 삼문(三門) 왼쪽 주차장 공간에 숨은 듯이 서 있는 ‘교토해방운동전사의 비’ 앞에서 묵념으로 위령의 마음을 전했다.

교토해방운동전사의 비는 “민주주의 일본을 위해 교토에서 진보적·혁신적 사회운동, 노동운동 등에 헌신한 선각자들을 현창하기 위해” 1958년 건립됐다. 아카하타(적기)가 관을 덮은 형상으로 “영원한 영광과 무한한 감사를” 영령들에게 바치고 있다. 이후 해마다 5월 둘째 일요일에 추도제를 열고 그 전 해에 숨진 사람을 추가 합사하는데,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까지 총 3064명이 합사됐다고 한다. 그중 1983년 이전 기준으로 11명의 한국·조선인(해방 전 5명, 해방 뒤 6명)이 포함돼 있다.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에는 그 중 4명의 이름이 나와 있다. ‘정휘세(鄭輝世, 1906~1931), 경북 예천 출신, 1931년 나라형무소 옥사’ ‘박진(朴震, ?~1932), 경남 출신, 1932년 9월 마쓰바라경찰서에서 고문사’ ‘황주승(黃周承), 1931년 마쓰바라경찰서 고문사’ ‘안윤익(安允益), 1952년 7월 교토 미나미야마시로 반기지투쟁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 이분들 중 정휘세 선생만 2006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돼 있다. 나머지 분들도 해방 전 활동을 근거로 ‘독립운동가’로서 마땅히 기억되고 현창되어야 할 것이다.

아카하타(적기)가 관을 덮고 있는 모습의 ‘교토해방운동전사의 비’. “영원한 영광과 무한한 감사를”이라는 작은 글씨 아래 3천여 명의 위패가 묻혀 있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우토로마을이다. 한일우호와 시민연대의 현대적 상징이 된 ‘자이니치 거주권 확보 투쟁’의 현장. 교토역에서 긴테쓰교토선 신타나베행을 타고 10정류장 가면 이세다역이다. 서쪽 출구로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우토로지구를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1940년대 군용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살던 ‘한바’(飯場.건설노동자 합숙소)에서 시작해 마을을 이룬 우토로는 2차대전 뒤 일본 정부가 비행장 땅을 기업에 매각하면서 졸지에 무허가촌이 됐고, 이후 기나긴 생존권 투쟁이 전개된다.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1989년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국제적인 호소에 나섰고, 우토로 소식을 알게 된 한국에서도 지원 활동이 벌어진다. 두 나라에서 우토로 토지 매입을 위한 시민모금운동이 2005년 전개됐고, 2007년에는 한국정부도 나서서 매입자금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참여정부 때 이야기다.

드디어 2017년 토지 매입이 성사됐고 주민들은 새로 지은 시영주택에 입주하면서 우토로마을의 기나긴 싸움이 ‘행복하게’ 마무리됐다. 지난해 4월에는 한국의 ‘아름다운재단’이 진행한 모금지원 등에 힘입어 ‘우토로평화기념관’이 건립됐다. 올해 1월에는 벌써 방문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만수사 입구의 ‘재경도조선인불교도 귀국기념비’. “세계의 항구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자”는 문구가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필자가 방문한 5월13일에도 일본 학생들과 시민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견학하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 방명록을 몇 개 읽어본다. “인권에 무감각한 일본에 실망해왔는데 우토로기념관을 보고 아직 실망할 때가 아니다, 서로 손잡고 사회를 변화시켜가야 한다고 다시 용기를 가지게 된다. 감사합니다” “베이징겨울올림픽 선수들처럼 한국, 일본이라는 국적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우정을 나누고 싶다”….

기념관 3층 벽에는 재일 조선인학교 6학년생들이 남기고 간 종이학 편지가 있다. “앞으로 조선사람답게 력사를 잘 알고 우리말도 많이 배워서 우리나라의 축구 선수가 되겠어요.” 한국과 함께 손잡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일본 젊은이들과 우리 역사와 말을 잘 배워서 우리나라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조선인학교 소년에게 동지같은 마음으로 뜨거운 연대의 응원을 보낸다.

우토로평화기념관 누리집에 들어가면 우토로마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교와 기관, 단체가 우토로기념관에 가보기를 권한다. 우지시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불교 사원인 뵤도인(평등원)에서 차로 10여분 거리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