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서울&] 자연이 사람을 살린다

서울, 이곳 l 양천구 용왕산

등록 : 2026-07-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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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산 스카이워크에서 월드컵대교와 성산대교, 멀리 북한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분명히 들었다. 딱따구리가 ‘똑도도독’ 나무에 구멍 파는 소리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보았으나 놓쳤다. 어수룩한 내 눈앞에 호락호락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다. 대신 저만치 햇살 아래 긴 꼬리를 가진 귀여운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몸에 비해 꼬리가 길고, 특히 꼬리의 파란 깃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찾아보니 물까치란다. 참새목 까마귀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텃새라는데 나는 처음 보았다. 이 도시엔 비둘기나 까치, 까마귀 혹은 참새 말고도 제 목소리를 내는 훨씬 많은 새가 살고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부지런히 번식하고 생장하는 생명체가 이 도시에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양천구 용왕산은 해발 78m에 불과한 낮은 산이다.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깝지만, 한강 변에 위치해 정상에 오르면 제법 높은 곳에 오른 듯 파노라마 뷰가 펼쳐진다. 조선 시대 지도에 표기된 이 산의 원래 이름은 엄지산(嚴知山). 천호(千戶)가 살아도 될 정도의 넓은 들판이라는 뜻으로, ‘으뜸’이라는 의미의 엄지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실상 이 지역은 천호나 되는 집이 아니라, 말을 방목해 키웠던 목장 지대로 쓰였다. 지금은 ‘나무 목’을 써서 목동(木洞)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를 목’을 써서 목동(牧洞)이 원래 이 땅의 용도에 맞는 이름이다.

그러나 ‘천호가 살아도 될 정도의 넓은 들판’이었던 이 지역은 수백 년이 지나 드디어 이름값을 하게 된다. 천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사는 대단지 주거지 즉, 목동 신시가지가 조성된 것이다. ‘이름이 운명’이란 말이 소름 끼치도록 잘 들어맞았다.

용왕산 숲속 카페는 양천구 시니어클럽이 운영한다.

이 지역 백성들이 지도에 표기된 엄지산이라는 이름 대신 용왕산이라 부른 사연은 산 아랫마을에 살던 박씨 노인의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어느 날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엄지산 아랫마을 박씨 노인이 죽어 용이 되었고 그 용이 환생해 왕이 되려 하자 임금이 용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용’과 ‘왕’을 붙여 ‘용왕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비록 왕이 되려던 용은 죽었지만 이름으로는 지금까지도 왕으로 남아 있으니, 당시 민심은 용이 환생해 왕이 되길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공연한 궁금증이 생긴다. 나지막한 동네 뒷산의 설화치고는 서사가 꽤 웅장하다.


용왕산은 규모에 비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성하고, 특히 생태가 잘 보전되어 있어 양천구민들에게 보물 같은 공원이다. 산 정상에 있는 용왕정은 성산대교와 월드컵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막힌 데 없이 한강과 강 너머 북한산, 인왕산, 남산까지 볼 수 있는 조망 명소다. 한강의 동과 서가 한눈에 보이는 지리적 이점 때문일까. 매년 1월1일 새벽 6시가 되면 이곳에서 ‘해맞이 축제’가 열릴 정도로, 용왕산은 주민들에게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장소다.

2016년에는 용왕산 무장애 숲길이 조성돼 누구나 쉽게 산을 즐길 수 있게 됐고, 특히 올봄에는 달팽이관처럼 나선형으로 설계한 보행로를 개방해 한강 조망의 멋과 맛을 끌어올렸다.

용왕산 정상 부근에 다목적운동장을 조성했다.

용왕정에서 스카이워크를 따라 내려오면 다목적운동장으로 이어지는데, 넓은 인조잔디 구장과 헬스 기구가 꼼꼼히 배치돼 있어 계절이 좋을 때는 답답한 실내 헬스장보다 쾌적하다. 다목적운동장 바로 인근에 용왕산 숲속 카페가 지난겨울 문을 열었는데, 양천 시니어클럽이 운영하며 시니어 바리스타들이 음료를 제조한다. 볼거리, 즐길 거리에 이어 일거리까지 창출했으며, 도심에서도 자연이 살아 숨 쉬도록 생태 공간을 완벽히 구현했으니 용왕산이 양천구민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유아를 위해 마련된 숲속 놀이터.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1980년대 목동 신시가지 조성이라는 대규모 개발 속에서 용왕산을 없애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선택이었는가. 그때는 개발이 한창이었고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산을 깎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던 시기였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 생태나 환경은 우선순위에서 빈번하게 밀려났다.

그 시기 해발 78m짜리 낮은 산이라 하여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연의 혜택 역시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똑도도독’ 나무에 구멍을 파는 딱따구리 소리도, 햇살 아래 파랗고 긴 꼬리를 뽐내는 물까치의 자태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을 살리면, 그 자연이 또다시 사람을 살린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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