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

봉은사에 홍매화 피니 바야흐로 봄이로다

서울, 이곳 l 강남구 봉은사

등록 : 2026-03-2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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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조사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영각. 서울에서 홍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곳으로 유명하다.

매화는 장미과 벚나무속 매실나무의 꽃이다. 매화와 벚꽃은 얼핏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장 뚜렷한 차이는 향기다. 벚꽃은 향기가 거의 없고 매화는 그윽한 향기가 있다. 생기긴 연약해 보여도 이른 봄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기상이 굳세다.

김남조 시인은 그의 시 ‘매화 사랑’에서 매화를 가리켜 ‘꽃이면서 정신’이라 칭송했고, 예부터 수많은 시와 그림에서 매화는 절개를 상징하는 소재로 사용됐다. 그래선지 벚꽃은 화사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매화는 어딘가 고결하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시적 감수성이 둔한 내게는 매화보다 오히려 매실의 효용성이 더욱 값지다. 싱그러운 청매실로 매실청이나 장아찌를 담가두면 1년 내내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매실을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일본의 우메보시는 처음 맛보는 이들은 “이게 무슨 맛이냐”며 인상을 쓰기 일쑤지만, 어느 순간 그 거북한 맛이 개운하게 느껴진 뒤부터는 한번씩 생각나게 하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꽃으로 또 열매로, 예술에서 생활까지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매화가 지금 전국을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다. 남도에선 광양 매화축제가 지난 16일부터 열렸고, 서울에선 강남구 봉은사에 홍매화가 만개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봉은사 홍매화.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봉은사의 홍매화는 사명대사(1544~1610)가 일본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조직해 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라 구하는 일에 앞장섰던 고승이자 의병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간 노력 끝에 임진왜란 때 잡혀간 3천여 명의 백성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외교적 성과도 거뒀다. 바로 그때 일본에서 매화도 함께 가져와 봉은사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 있는 나무가 그때 그 나무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봉은사와 매화는 실로 그 역사적 의의가 깊다.


높은 빌딩 숲 사이 고즈넉한 천년 고찰 봉은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봉은사를 가리켜 천년 고찰이라 부르는 것은 봉은사가 794년 통일신라의 원성왕 때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조선 중기 때 일이고 그 중간의 역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국사책에서나 보던 이야기가 천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시대, 내가 사는 고장에 살아 숨 쉬는 역사로 존재한다니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게다가 서울에서도 사람과 차가 가장 많이 다니는 곳에 천년의 역사가 지워지지 않은 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과연 역사 도시 서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봉은사를 방문해 꼭 들러볼 만한 곳은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현판의 일종)으로 유명한 ‘판전’이다. ‘판전’은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 화엄경 소초 81권을 보관하고 있으며 특히 ‘板殿’(판전)이라고 쓰인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서체다. 23m 높이의 초대형 불상인 미륵대불은 특히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고, 그 옆에 있는 ‘영각’은 원래 역대 조사스님(법맥을 잇는 중요한 승려)들의 진영을 모신 곳이지만 이 계절엔 영각 앞 홍매화 덕분에 봉은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봉은사를 창건한 연회스님의 법명에서 이름을 딴 전통찻집 연회다원.

그 밖에 봉은사를 창건한 연회스님의 법명에서 이름을 딴 전통찻집인 ‘연회다원’과 공양간 국수, 신도들이 직접 구워 판매하는 풀빵이 저렴한 가격과 만족할 만한 맛으로 근처 직장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얼마 전 남편과 남도 여행을 갔다가 숲에서 미끄러져 슬개골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당장 몸은 조금 불편했지만 두 발로 원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것 중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우내 회색빛을 띠던 서울이 여기 봉은사의 홍매화로부터 시작해 한 겹 한 겹 색을 칠한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차례 꽃물을 들이고 이제 곧 짙푸른 초록의 여름도 다가올 것이다. 아무리 홍매화가 아름답고 매화 향이 그윽한들 그것이 언제고 볼 수 있는 꽃이었다면 당연한 듯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매화가 아름다운 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꽃을 피워낸 수고를 알기 때문이다. 올해도 당연한 듯 봄이 찾아오고 매화가 꽃을 피웠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 씩씩하게 꽃을 피워낸 매화의 수고에, 그리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느라 애쓴 우리 모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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