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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대신 숲을 처방합니다

1천만 서울 시민의 일상을 껴안는 치유 현장
도심 속 마음 돌봄 숲, 불암산 산림치유센터

등록 : 2026-03-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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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산림치유센터 옥상에서 바라본 불암산 모습.

도심의 소음이 잦아드는 불암산 자락, 부드러운 황톳길을 맨발로 걷다보면 발끝에서부터 상쾌함이 전해진다. 걷기를 마친 후 40~45도의 뜨거운 페퍼민트 약초물과 15~18도의 차가운 치자 약초물에 번갈아 발을 담그는 ‘물 치유'를 거치면 어느새 뭉쳤던 근육이 풀리고 관절염 등의 통증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 약초 향이 배어나는 오감치유실에서 따뜻한 쌍화탕 한 잔을 마시며 일주일간 짓눌렸던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이 과정은 단돈 1만원으로 누릴 수 있는 이른바 ‘갓성비' 힐링, 서울 노원구에 있는 불암산 산림치유센터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2020년 10월 숲의 혜택을 멀리 시외로 나가지 않고도 누구라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조성된 이곳은 ‘서울시 최초의 도심형 산림치유센터'다.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문을 열었던 도심의 숲은, 그 치유 효과가 입증되면서 이제 끔찍한 사건사고 현장에 노출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기 쉬운 소방관과 경찰관들의 마음까지 보듬는 핵심적인 치유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은 자치구 1호 산림치유센터로서 대한민국 도심형 산림복지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 불암산 산림치유센터를 방문해 숲이 어떻게 우리 삶을 구원하는 ‘사회적 처방'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지 짚어봤다.

치유 프로그램에는 명상과 차 그리고 싱잉볼도 활용된다.

‘자치구 1호’의 뚝심…“숲은 일상 속에 있어야”

현행법상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특별시 도심에 공식적인 ‘치유의 숲'을 조성하려면 최소 25만㎡(약 7만5천 평) 이상의 거대한 산림 면적을 확보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서울 도심에서는 충족하기 불가능한 기준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정작 산림치유가 가장 절실한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찌든 도심 직장인과 시민들”이라며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수십만㎡의 치유 전용 숲을 새롭게 획정하는 대신, 이미 시민들의 접근성이 뛰어난 기존 불암산 자락의 숲길과 공원을 치유의 무대로 삼고 그 거점이 될 488㎡ 규모의 조그만 ‘도심형 산림치유센터(비법정 시설)’를 세우는 우회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2020년 10월 서울시 최초의 도심형 산림치유센터가 탄생했다.

개관 직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집합이 제한되던 그 시기 센터는 비대면 전환 대신 철저한 방역 속에 5명 이하 단위의 소규모 대면 프로그램을 고집했다. 숲이 주는 평온함은 화면으로 온전히 전달될 수 없으며, 산림치유지도사와 눈을 맞추며 교감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다는 뚝심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치열한 대면 운영 경험은 불암산 산림치유센터가 도심형 산림치유의 독보적 모델을 완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불암산 산림치유센터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와상휴식을 체험하고 있다. 노원구 제공

산림치유지도사의 정교한 의학적 개입

숲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단순히 숲을 산책하는 것과 ‘산림치유'는 확연히 다르다. 불암산 산림치유센터의 가장 큰 차별점은 바로 전문적인 ‘산림치유지도사'의 의학적·생리적 개입에 있다.

김주연 센터장(산림치유학 박사)은 “스트레스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전두엽을 활성화하고 불안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안정시키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숲속에서의 세밀한 호흡법과 명상을 지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각적 자극을 줄이고 감각을 쉬게 하는 훈련,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동자 뒤 송과체를 통과하게 하여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합성을 유도하는 과정 모두가 치유지도사의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다.

심지어 물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단순히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는 데 그치지 않고 다리의 어떤 부위를 자극하고 이완할지 인체 해부학적 지식까지 동원한다. 단순한 휴게 시설을 넘어, 신체 생리와 숲 생명을 연결하는 ‘예방적 치유 인프라'로서의 면모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불암산 산림치유센터 내 황톳길. 노원구 제공

‘자기 돌봄’을 넘어 ‘사회적 처방’으로

애초 서울 시민의 여가와 건강 증진을 위해 마련됐던 불암산 산림치유센터는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상시 노출되는 소방관과 경찰관들을 위한 치유의 장으로도 확장됐다. 실제로 노원경찰서와 노원소방서 대원들은 꾸준히 숲을 찾으며 센터 프로그램을 이용했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센터는 2023년 노원소방서장 감사패, 2024년 노원경찰서장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1년 전 직무스트레스 예방관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노원소방서의 한 소방관은 “자연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숲의 향기와 맑은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니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리고 평온해질 수 있었다”며 “이 경험은 심리적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업무에 임하는 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산림치유 전문가들은 스트레스 상황을 알아차리고 숲의 호흡법을 통해 ‘스스로를 돌보는 대처 관리 방법’(자기 돌봄)을 길러주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자기 돌봄' 모델은 이제 특수직군을 넘어 지역사회 소외계층 전체를 껴안는 ‘사회적 처방’(Social Prescription)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센터가 가장 공들이는 분야는 정신건강 지원이다. 서울시민의 절반 이상(53.9%)이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느끼고, 우울·불안 등 정신건강 문제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산림치유센터는 ‘예방적 비의료적 개입' 공간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불암산 산림치유센터 전경. 노원구 제공

도심형 산림치유 모델, 각 자치구로 점차 확산

노원구 생명존중위원회와 연계한 ‘노원형 녹색처방(생명존중과 연계)' 프로그램은 기분 변화를 목표로, 자살예방에 기여하는 자연 기반 활동으로 구성된다. 복지관과 연계한 프로그램은 노원구 어르신 대상의 우울·불안완화 활동을, 주민센터 연계 프로그램은 돌봄종사자의 심리정서 지원을 목표로 한다.

중독관리센터의 환자, 난임 부부, 치매안심센터의 어르신, 그리고 사회와 담을 쌓은 고립·은둔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정원과 숲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고 있다.

만족도가 증명한 치유의 힘

도심형 산림치유 성과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불암산 산림치유센터의 공공기관 연계 프로그램 참여자는 2023년 7회(55명)에서 2024년 31회(283명), 2025년 50회(480명)로 불과 3년 만에 8.7배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5년 한 해 동안 운영한 전체 프로그램 횟수만 무려 1730회, 총 이용 인원은 2만 3456명에 달한다. 도심 접근성이 좋은 센터의 특성을 십분 발휘한 결과다.

이곳은 과거 무허가 건축물, 보신탕집, 쓰레기 등이 뒤섞인 동네의 골칫거리였다. 노원구는 훼손된 산림을 복원하며 이곳 일대를 ‘힐링타운’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자연의 힘을 도시의 생활 속에 녹이는 노원형 힐링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2020년 산림치유센터를 개관한 이후에도 구는 힐링타운 이곳저곳에 새로운 즐길 거리를 늘리고 시설을 확충했다. 하지만 산림치유센터는 불암산힐링타운의 정신을 구현하는 핵심 위치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용객들의 압도적인 만족도 수치다. 2025년 단체 방문객 45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로그램 내용에 만족한다는 긍정 응답 비율이 무려 98.9%에 육박했다. 치유 전후 심리·정서적 상태 변화를 묻는 말에서도 ‘스트레스 감소 또는 피로 완화’ 긍정 97.6%, ‘마음의 정화’ 긍정 97.2%, ‘평온함 또는 심신 안정’ 긍정 98.7%를 기록했다. 센터 인근에는 무장애 데크길과 전망대 등 약자를 배려한 불암산힐링타운이 조성되어 있어 시너지를 통해 만족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실제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이러한 통계를 뒷받침한다. 인생의 고비에서 숲으로부터 깊은 위로를 얻은 사례가 줄을 잇는다. 5년 동안 시험관 시술을 하며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 살았던 한 참가자는 “치유센터에 다니며 몸에서 조금씩 힘을 뺄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숲에서 나를 돌본 시간이 쌓여 마침내 지난해 가을 배아 이식까지 마쳤다”며 “생명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됐다”고 벅찬 감동을 전했다.

단순한 휴식을 넘어 진정한 자아를 되찾는 경험도 일어난다. 또 다른 참가자는 “가장 강렬했던 경험은 숲에서 바다 물결처럼 비치는 햇살인 ‘윤슬’을 보았던 순간”이라며 “치유는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숲 속에, 그리고 내 안에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큰 전환점이 됐다”고 고백했다.

점차 번지는 모두를 위한 숲의 진화

참나무의 짙은 수피를 닮은 기와 진회색으로 센터를 소박하게 꾸민 김 센터장은 “산림치유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생명을 존중하고 순리에 따르려는 마음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노원구의 도심형 산림치유 모델은 서대문구, 은평구, 강서구 등 서울 전역의 많은 자치구로 들불처럼 번지며 적극적으로 벤치마킹되고 있다. 노원구는 불암산에 이어 영축산과 수락산에도 산림치유 시설을 추가 조성할 예정이다.

이제 숲은 주말에 땀 흘려 오르는 산이 아니라, 지친 일상 속 내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다독이는 ‘내 집 앞 마음 돌봄 공간'으로 진화했다. 우울하고 고립된 현대 도시의 처방전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가장 소박한 흙길 위에서 가장 부유한 위로를 선사하는 숲.

지금 마음이 무겁다면 약국 대신 가까운 도심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숲은 언제나 당신을 안아줄 준비가 돼 있다.

하변길 기자 seoul0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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