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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오지마을, 정이 살아 있는 마을로 탈바꿈

도시재생 끝낸 녹번·응암 산골마을 꾸준한 대화로 마을밥상 공동체 형성

등록 : 2017-04-13 15:46 수정 : 2017-04-1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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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산골마을은 주민이 주도해 마을을 재생하는 ‘서울시 주거환경관리사업’을 벌여 ‘이사 오고 싶은 마을’로 새로 태어났다. 지난 8일 마을 전경이 보이는 한 주택가 옥상에서 주민들은 마을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살짝 웃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뽕잎볶음은 뒷산 뽕나무 잎으로 만든 건데, 맛있죠?”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던데, 괜찮으세요?” “그 집 딸은 남자친구 있어요?” “다들 손맛도 좋으신데, 산골마을 요리학교를 만들까요?”

지난 4일 낮 12시께 서울시 은평구 녹번산골마을의 마을회관인 ‘녹번산골 드림e’(은평구 통일로 578-27)는 주민 10여명의 활기찬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이웃 간 정을 나누는 ‘마을밥상’이 열린 것. 이날은 마을에서 손맛이 좋기로 유명한 성영희(80)씨와 윤순자(74)씨, 강옥희(81)씨가 아귀찜과 오이무침, 청국장 등을 만들었다. 신현수(77) 녹번산골마을 대표가 집에서 가져온 ‘뽕잎볶음’이 밑반찬 가운데 가장 인기였다.

주민들이 이렇게 모여 밝게 대화하는 모습은 불과 5년 전인 2012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당시 녹번산골마을은 이웃한 응암산골마을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후 주거지역이었다. 산골마을 전체의 건물 노후도가 무려 88.8%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기존의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이 아닌 ‘박원순표’ 마을 개량과 복원 방식인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한 뒤 산골마을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서울시는 박원순표 도시재생사업으로 평가받는 이곳에 2012년 이후 총 30억원을 투입해 지난 2월 약 5년 만에 사업을 마무리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전혀 모르고 지냈어. 이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지. 마치 잃어버렸던 가족을 되찾은 기분이야.” 주민 김우례(82)씨는 산골마을의 변화된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민 간의 늘어난 소통’을 꼽았다.

골절 치료에 쓰는 광물 약재인 산골(구리가 나는 데서 나오는 푸른빛을 띤 누런 쇠붙이)이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인 ‘산골(山骨)마을’은 원래는 지금의 녹번산골마을과 응암산골마을이 합쳐져 있었다. 하지만 1972년 통일로가 면적 1만3896㎡인 마을을 관통하면서 마을이 두 쪽이 났다. 4층 이상 건물이 전체의 3%밖에 안 될 만큼 고층 건물이 없었고, 단독과 다가구주택에 270가구 550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산골마을은 도시재개발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1990년대 말부터 주변 일대에 재개발 광풍이 불었지만,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산골마을은 재개발 구역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은평구는 산골마을 주민들에게 재개발 대신 주민이 주도해 마을을 재생하는 ‘서울시 주거환경관리사업’(이하 주거 환경 개선)을 제시했다. 이후 2012년부터 기반시설 확충과 공동체 활성화, 개별 주택의 개보수 등의 사업이 진행됐다. 신 대표는 주거환경개선 결과 마을 곳곳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산골마을은 1970년대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그때 무허가로 지은 주택이 많기도 했고, 하수관 등의 기반시설도 그때 들어선 거야. 이후에 환경 개선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사는 데 많이 불편했지.”

비만 오면 역류했던 하수관을 큰 것으로 바꿔 땅에 묻었고, 경사가 심하고 울퉁불퉁했던 골목길은 평탄하면서도 미끄럼을 방지할 수 있도록 포장했다. 낡고 위험했던 계단은 말끔히 새로 단장했고, 고령자가 많이 사는 마을의 특성을 고려해 골목에는 지팡이처럼 지지하며 걸을 수 있는 핸드레일을 설치했다.

“마을의 외관보다 속이 더 많이 변했어요. 하얀색 창틀이 있는 집은 모두가 단열과 방음, 보일러 등을 설치한 곳이죠. 전에는 곰팡이가 필 정도로 단열이 안 돼서 겨울에는 추위로 고생했거든요. 요즘은 지붕에 설치한 미니태양광 덕분에 전기료도 전보다 월 2만~3만원 정도 줄었죠.”


장양훈(62) 응암산골마을 대표는 주민들이 에너지자립마을에 열의를 다하고 있는 이유가 ‘에너지 손실’ 경험이 만든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이 마을에 혼자 살던 한 어르신(91)이 설날 연휴 엄동설한에 난방이 안 된 냉방에서 자다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평구 산골마을 주민들은 함께 밥을 지어 먹는 ‘마을밥상’ 같은 공동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용일 기자
주민 이지연(50)씨는 무엇보다도 이렇게 마을이 바뀔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서울시의 지원과 함께 마을 주민들의 이해와 양보 정신이라고 한다. “전에는 이삿짐을 나르는 2.5톤 트럭이 응암산골 중턱까지밖에 못 들어왔어요. 소방도로 확보 등 도로 폭을 넓히기 위해 주민들이 담장을 허물고 공간을 양보했죠. 이제는 마을 꼭대기까지 2.5톤 트럭이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마을을 바꾼 주민들의 이해와 소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012년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매주 마을회의를 열고, 같이 식사를 하는 ‘마을밥상’ 같은 공동체 활동이 쌓이고 쌓여서 된 것이다. 이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한다.

또 주민들은 마을의 공동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청국장이나 퀼트 냄비집게, 천연 비누 등을 만들며 수익사업도 함께 벌이고 있다. 각 마을이 2012년부터 지금까지 1000만원 정도씩 마을기금을 확보할 정도로 수익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다른 지역 주민들이 산골마을의 존재조차 몰랐어요. 하지만 요즘은 다들 우리 마을을 부러워하죠. 마을에서 운영하는 공동 텃밭은 분양받을 수 없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인기고요.” 장 대표는 변화한 마을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더 노력한다고 했다.

산골마을 주민들은 칠월칠석인 오는 8월28일 응암산골과 녹번산골이 이어진 생태연결로에서 산골마을 축제를 열 계획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산골마을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이 담긴 축제가 기대된다.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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