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냉면·한정식 먹고나니, 되레 이탈리아 맛 그리워져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 ⑫ 갑작스러운 일시귀국 이후

등록 : 2019-08-16 16:26 수정 : 2020-06-1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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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일로 뜻밖에 7월 말 귀국해

오매불망 물냉면·한정식 ‘흡입’

하지만 꿈꾸던 맛은 그저 그랬다

향수병 사라진 서울서 새로운 증상

이탈리아 요리의 순수한 맛 그리워

그라노 파다노 치즈,

산 마르자노 토마토 통조림 사서

이탈리아식 소스 만들기 시작


셰프가 차려준 점심 저녁은 맛이 있지만 고기 중심이다.

휴가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는 ‘바칸제’(vacanze)다. 휴일을 뜻하는 ‘바칸자’(vacanza)의 복수명사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이 그렇듯 이탈리아의 여름휴가는 한 달 정도로 길다.

내가 머물고 있는 토리노는 이탈리아 북부여서 여름휴가 때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로마나 피렌체처럼 많지 않다. 그래서 도심은 7월 초부터 썰렁해진다. 이렇게 긴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토리노 인근 레스토랑도 당연히 여름 휴가철에는 문을 닫는다. 보통 2주 쉰다. 한 달을 닫는 곳도 있다.

내가 인턴으로 일하는 레스토랑도 8월16일부터 31일까지 휴가다. 맨 처음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시작했던 6월 초, 휴가철에 한국에 있는 아내를 이탈리아로 불러 볼로냐와 피렌체 등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하루 12~14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으로 내 체력은 금세 바닥났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낯선 이탈리아를 아내와 함께 관광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대신 내가 휴가 때 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나를 극심한 향수병에 빠뜨린 음식은 물냉면이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간절히 먹고 싶었던 서울 ㅇ면옥의 냉면 사진.

그런데 갑자기 내 개인적인 일이 생겨 7월31일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8월 초 급한 일은 마무리됐지만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어정쩡한 상황이 돼버렸다. 8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레스토랑이 휴가인 탓에 이탈리아로 돌아와도 한 주 정도 근무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셰프에게 양해를 구했고 8월 말까지 한국에 있을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향수병을 달래는 것이었다. 향수병의 증상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나는 익숙한 음식에 집착했다. 3월 초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입학한 뒤 한 달 만에 향수병에 걸렸다. ‘아재’ 입맛 탓에 된장에 다시마까지 챙겨 갔던 나를 한국이 그리워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 음식은 물냉면이었다. 이탈리아에도 거의 모든 한국 식재료가 있었다. 고추장, 배추, 떡 등 거의 모든 것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치도 떡볶이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물냉면은 예외였다.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레스토랑은 토리노 외곽에 있어 슈퍼마켓이 주변에 없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자 나는 한상 딱 부러지게 차려주는 한정식을 그리워하게 됐다.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인 밀라노에 여행 가는 동기들에게도 부탁했지만 물냉면은 찾지 못했다. 한국의 가족에게 소포를 받는 동기에게 ‘인스턴트 냉면’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5월 말 졸업 때까지 ‘냉면 소포’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비빔라면으로 물냉면을 대체해보려 했지만 비빔장의 가벼움 탓에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파스타로 ‘유사 냉면’을 만들었다. 파스타 가운데 가장 가는 카펠리니로 면을 삶고 다시마와 버섯을 우린 물과 이탈리아의 인스턴트 소고기맛 조미료로 간을 맞추어 육수를 만들었다. 먹을 만했지만 향수병은 유사 냉면으로 치유되지 않았다.

6월 초 인턴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향수병에 시달렸다. 평양냉면 대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은 한정식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를 다닐 때는 기숙사 근처에 슈퍼마켓이 여러 곳 있었다. 덕분에 신선한 제철 과일과 채소를 거의 날마다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일하는 레스토랑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토리노 외곽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15분을 나가야 했다. 과일이나 채소를 사실상 구하기 어려웠다.

토리노 중심가에 있는 한식당의 비빔밥은 이탈리아에서 향수병을 달래줬던 최고의 음식이었다.

대신 셰프가 차려주는 대로 점심·저녁을 먹어야 했다. 셰프는 피에몬테 사람답게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셰프의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와 과일은 턱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 변비에 걸리기도 했다. 나물 반찬이 많은 한정식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 한 주 정도는 급한 일들을 마무리해야 했다. 향수병의 원인인 냉면과 한정식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 주를 보내고 난 8월7일에야 처음으로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6개월 만에 먹은 물냉면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인천공항에 내리지마자 내가 즐겨 찾던 을지로의 냉면집을 찾았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주일 넘게 한식을 먹은 탓에 감흥은 떨어졌다.

레스토랑 레시피 중 인상 깊었던 복숭아 셔벗. 서울에 오자마자 만들어봤다. 복숭아를 오븐에 구워서 믹서에 갈아서 만든다.

한정식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함께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주는 한정식집에 갔는데, 그저 그랬다. 나물과 김치가 내가 생각한 것만큼 맛깔나지 않았다. 계절 탓인지 곰삭은 젓갈 맛이나 강렬한 향취가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오매불망 그렸던 음식과 막상 서울에서 먹은 음식에는 뚜렷한 간극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워했던 물냉면과 한정식 대신 매운 짬뽕이나 얼큰한 칼국수를 탐닉했다. 맵고 자극적인 한식을 찾아 다닌 것이다. 그래서 삭힌 고추를 갈아 넣은 매운 내장탕이나 얼큰한 곱창전골도 많이 먹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는 거의 찾지 않았던 음식이었다. 아마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한식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탓에 좀더 원초적인 한국 음식을 찾게 됐나보다.

하지만 향수병이 사라진 서울에서 나는 새로운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엔 이탈리아 음식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쌓인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나는 그라노 파다노 치즈·산 마르자노 토마토 통조림 등을 사서 이탈리아식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지에서의 진한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비슷한 맛은 낼 수 있었다. 토리노에서 물냉면을 만드는 것보다 서울에서 이탈리아 코스 요리를 만드는 게 훨씬 쉬웠다.

가자미로 만든 이탈리아식 어만두. 밀레베리라고 한다. 부라타 소스와 갑오징어 토마토 라구를 함께 곁들였다.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만든 이탈리아 요리로 아내와 함께 먹었다. 화이트와인과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즐거워했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요리에 아내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래서 아내가 어서 귀국해 레스토랑을 열어 유학 경비를 회수하라고 할까봐 마음을 졸여야 했다.

물소 젖으로 만든 부라타 치즈를 서울에서 구해 소스를 만들었다. 부라타는 버터 같다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새콤해서 생선이나 튀김요리와 잘 어울린다.

이탈리아에서도 유명한 산 마르자노 토마토. 과육 자체의 맛과 향기가 좋아서단순히 소스뿐 아니라 구워 치즈와 함께 전채 요리로 내놓기도 한다. 이탈리아 요리의 레시피가 단순해도 그 맛이강렬한 것은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 덕분이다. 한국에서도 통조림으로 구할 수 있다.

내가 서울에서 이탈리아 요리에 유난을 떠는 것은 향수병은 아니다. 이탈리아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물이나 냉면처럼 즐겨 먹던 친숙한 음식이 따로 있지도 않다. 하지만 9월 초 이탈리아로 출국하기 전까지 계속 이탈리아 음식을 만들 생각이다.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계속 일했던 이탈리아에서의 습관 탓일 수도 있지만, 설탕이나 인공 조미료 없이 단순한 재료만으로도 강렬한 맛을 끌어내는 이탈리아 요리에 중독된 것이더 큰 이유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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