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에 시와 흥취가 더하니 풍류 문화가 되살아나

[이인우의 서울&] 조선후기 여항문학 재현판 벌인 전통주 명인 박록담씨

등록 : 2016-05-04 15:54 수정 : 2016-05-0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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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이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연구소 1층의 술 저장고에서, 우리 전통 술의 본맛은 누룩 냄새가 아닌 꽃향기임을, 백 가지 봄꽃을 모아 만든 백화주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양수(陽數)가 겹친 삼월삼짇날(음력 3월3일) 옥류동 계곡 너른 마당에 진달래 화전이 지저진다. 온갖 봄꽃들을 넣어 빚은 백화주(百花酒)가 동이째 걸러진다. 시 좀 짓는다는 시인 묵객들이 운(韻)을 내어 돌아가며 시흥을 겨룬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의 문인화 한 폭에 글씨 좀 쓴다는 사람들의 화제(畵題)도 빠지지 않는다. 시서주악(詩書酒樂)이 한 그림 속에 있으니 문기 넘치는 풍류의 진면목이다. 막 걸른 봄꽃술에 흥취가 오르니 흰 광목에 점점이 홍매화 떨어지고, 한바탕 상춘의 새타령이 흥겹다. “삼월삼짇날 연자(제비) 날아드니 호접(나비)은 편편, 나무 나무 속잎 가지에 가득….”

 조선시대에 시 짓기를 다투던 백전(白戰)의 묘사가 아니다. 올해 삼짇날이던 지난달 9일 서울 서촌 옥인동의 한 양옥집 마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촌 인왕산 자락은 조선 후기 서울의 평민문학이 만개했던 곳. 그 유서 깊은 터에 자리잡은 전통주점 ‘내외주가(內外酒家)’에서 펼쳐진 진풍경이다.

 조선 후기 여항(閭巷)문학을 대표하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문자향(文字香)을 오늘에 재현해 보겠다고 이런 판을 벌인 사람은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57)소장과 부인 박차원씨. 박 소장은 20대 때부터 오로지 우리 술 복원과 계승에 평생을 바쳐온 사람이다. 그가 복원한 전통주가 523종, 레시피로 재현된 술은 1000가지가 넘는다. 그의 연구소를 거쳐 간 직접 제자가 2만3000명, 제자의 제자까지 합하면 30만 문하라는 소리를 듣는 전통주 명인이자 예인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 술 주방문을 총망라한 5000쪽의 <한국의 전통주 주방문>(전 5권)도 새로 펴냈다. 그의 요즘 관심사는 우리 술 문화의 올바른 복원과 계승이다.

 “조상들은 술 한잔 마실 때도 문학과 그림을 곁들이는 멋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술 문화라고 하면서 외국인들에게 고작 찌그러진 주전자와 양재기 잔을 내밀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우리 술 문화의 정통성을 예술과 술이 격조 있게 어울린 문인들의 풍류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 서민적인 전통은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우리 술 문화의 품격을 높여 보자는 생각이다. 박소장 부부는 그래서 아예 송석원시사회가 열리던 이곳 서촌 옥인동에 지난해 9월 자리를 잡았다. 내외주가가 들어선 양옥집 터(종로구 필운대로 9가길 17)는 송석원시사의 맹주였던 송석도인 천수경(1757~1818)의 집터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자취를 찾기 어렵지만 추사 김정희가 천수경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쓴 예서체 ‘송석원’ 석 자가 바위에 새겨진 곳이다. 중인 출신의 문인, 서화가, 가객들은 이곳 옥류동 계곡 바위 아래에 모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조선 후기 평민문학의 한 정점을 찍어 보였다.

 내외주가라는 옥호는 남녀 구별이 엄연한 조선 시대에 양반가의 아낙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전래의 가양주를 팔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서민들은 이런 반가의 술집을 술병 든 팔뚝만 오간다 해서 ‘팔뚝집’이라 하기도 했다. 현대판 내외주가에서 파는 술은 부인 박씨와 제자 노영희씨가 빚은 2만~3만원대의 술이 대종을 이루지만, 박소장이 직접 빚은 명품들인 호산춘(세상만사), 송순주(청산별곡), 백화주(나비와 꿀단지), 감홍로(달빛여로) 중에는 20만원대의 고가품도 있다. 비싸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고급 와인이나 일본 사케의 값과 비교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은 병에 담긴, 박소장이 빚은 전통주들과 종로구 옥인동 ‘내외주가’에서 열린 삼짇날 화류놀이 풍경.

 “우리나라 술은 원래 방향(芳香)이 일품인데, 언제부터인지 누룩 냄새가 전통 술의 본맛인 양 알려졌습니다. 우리 술맛의 정수는 꽃향기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박소장은 쌀술을 빚는 한·중·일 삼국 중에 술꽃을 빚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아무튼 풍류 하나는 우리 조상이 한 수 위입니다.” 기자도 박소장 덕분에 그런 풍류를 경험했다. 수년 전 그가 비장하고 있던 도화주를 조금 맛본 적이 있는데, 꽃에 앉은 나비가 잡으려면 날아가고, 날아간 듯 다시 앉아 있는 그 찰나의 풍미를 코끝에서 느끼고는 정신이 아득해진 적이 있다.


 “술은 음악과 더불어 시와 서, 화를 이어 주는 매개이지요. 우리나라 사람은 뭐든 신바람이 나야 하는데 좋은 술과 음악은 좋은 신바람을 일으켜 뜻하지 않은 걸작을 탄생시킵니다. 저는 그런 위대한 탄생의 자리를 예술가들에게 마련해 주고 싶어요.” 박소장의 바람은 내외주가가 ‘우리 술 문화 공간’으로서 예술가의 사랑방이 되고, 예술의 산실이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런 바람이 현실이 된 자리가 바로 삼월삼짇날 화류(花柳)놀이였다. 이날 내외주가에는 우리 술 문화의 맥을 제대로 좀 이어 보자는 데 공감한 박소장의 문화예술계 지인들로 가득했다.

 “흰 광목 커튼을 뜯어다가 그 위에 매화를 치고(서화가 신규열) 화제(서예가 하선호, 캘리그래퍼 강병인)를 쓰는 동안 시조창(변진심)이 은은히 흘렀죠.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다 연서를 했어요. 누가 알겠어요? 먼 훗날 이 작품이 명품으로 평가되고, 이날 모임이 전설이 되어 인구에 회자될지요. 하하하.” 박씨 부부는 이날의 흥취를 단옷날, 칠석날, 중양절 등으로 이어갈 생각이다.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박소장도 빠질 수 없다. 흥겨웠던 병신년 삼짇날 화류놀이를 기념하고 내년 매화가 필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백화주음(百花酒飮) 한 수(‘나비의 꿀단지’)를 지어 낭송했다.

 (전략) 매화는 눈을 속이고 피어/영춘을 재촉하고/청산과 좋은 벗은/내게 이미 질곡이거니/백옥이 질그릇되는/까마귀 인정에랴.//백화로 빚는 청향의 술/백년의 인사(人事)려니/눈 오는 밤의 흥취를 다시 기약한다.//인정(人情)은 날마다 새롭고/술맛은/갈수록 깊어지리니. -병신년 삼월삼짇날에 내외주가에서 삼짇날 화류놀이를 갖고 백화주음을 낭독하다. 참석자:한복려 변진심 이지연 김수진 강병인 김미나 김홍렬 윤진철 최대식 이효재 방경환 임현지 정귀례 윤태석 김대홍 김난영 박금준 하선호 송영숙 이인우.

 이 또한 신(新)여항문학의 한 미담일지니, 부분이나마 여기에 기록하여 우리 술 문화 전통의 아름다운 부활을 북돋아 본다.

<서울&> 콘텐츠 디렉터 iwlee21@hani.co.kr

 

여항문학: 위항문학. 조선 선조 이후에, 중인·서얼·서리·평민과 같은 여항인 출신 문인들이 이룬 문학. <소대풍요>, <풍요속선>, <풍요삼선>의 시문집이 여기에 속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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