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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전기 없이 2박3일 캠핑카 여행

혼자 만든 ‘나무집’ 캠핑카로 떠나는 ‘비전화공방’ 1기들의 악전고투 여행

등록 : 2018-01-2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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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나무집’ 캠핑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비전화공방 서울’ 1기 제작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나무집’을 3개월 동안 120만원을 들여 혼자서 만든 김경미(왼쪽부터)씨와 박새로미, 홍정현, 허원씨.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하나, 둘, 셋, 영차!” 지난 13일 오전 은평구 서울혁신파크. 4~6㎡(1~2평) 남짓 조그마한 나무집을 몇 명이 구령에 맞춰 밀고 끌며 옮긴다. 1톤 트럭 위에 올려놓으니 영락없는 캠핑카다.

자세히 뜯어보면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과 같은 화학제품 대신 원목을 주로 사용했고, 전기 없이 수돗물을 식수로 바꿔주는 `비전화(전기와 화학물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정수기'를 넣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캠핑카다. 이 캠핑카를 만든 주인공은 1년 전만 해도 전동 드라이버조차 만져본 적 없던 앨리스(김경미·30)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비전화공방 서울’에서 ‘비전화 제품’ 제작, 친환경 건축, 유기농 농사,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한 작은 일 만들기 등을 배우고 있다. 캠핑카는 ‘비전화 제작자 과정’에서 익힌 목공 기술과 기본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석 달 동안 혼자 만든 것이다.

지난달 16일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친환경 문화장터 ‘마르쉐@’에 120만원을 들여 만든 캠핑카가 전시되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였다. 여러 곳에서 판매와 대여 문의를 받자, 앨리스는 캠핑카의 품질을 검증하기 위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첫 운행이라 낭만보다 모험에 가까운 여행에 동참한 사람은 ‘비전화 제작자 과정’ 1기 홍(홍정현·30), 로미(박새로미·32), 단영(허원·20), 수정(남수정·24)과 동료 같은 선생님 단디(성배경·36)까지 모두 6명이다.

화학제품 대신 원목, 비전화 정수기 사용


첫 목적지는 앨리스의 고향인 강원도 속초다. 차 안에서 여행의 테마를 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 “쓰레기를 최소화하자”고 제안하자 다들 좋다며 찬성했다. 물건을 살 때 비닐봉지를 받지 않고, 일회용품은 쓰지 않고, 페트병보단 유리병에 든 음료를 사기로 했다. 사실 비전화공방에서 9개월 동안 지내며 꽤 익숙해진 일상이다.

가격의 합리성과 순간의 편리성 너머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까지 내다보며 윤리적 소비를 하는 환경친화적 생활 습관이 어느새 삶에 밴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좋다는 걸 알아도 혼자서 실천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가까운 이가 “에이, 뭘 그렇게 유난스럽게 굴어” 한마디만 해도 금세 풀이 꺾인다. 비전화공방 동료들은 그렇게 여러 번 풀이 꺾인 채 타협하며 살아온 사람이거나, 어느새 면역이 생겨 유난스러움을 자처해온 사람이다. 그런 물줄기가 하나둘 모이니, 실행으로 옮기는 물살은 어느새 강해져 있었다.

자연에 가까운 난방 실험하다 위험할 뻔

단열재 두 종류에 단열 벽지까지, 약 40㎜ 두께의 단열층을 만든 덕에 캠핑카 안은 꽤 훈훈했다.

속초에 도착한 뒤 앨리스의 지인에게 캠핑 장비를 빌려 설악산 야영장으로 갔다. 그런데 웬걸, 겨울철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오토캠핑장의 수도를 잠근 탓에 카라반은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캠핑카는 내부에 수도 시설이 없어 괜찮다고 설득해봤지만, 규정상 안 된다는 답변에 진만 빼고 내려와야 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시무룩해진 일행은 고성에 있는 앨리스의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한적한 시골집 마당에 숯불을 지피고는 빨갛게 단 숯을 양철 용기에 담아 즉석에서 숯불화로를 만들었다. 이를 캠핑카 안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으니 꽤 훈훈했다. 앨리스는 캠핑카를 만들며 무엇보다 단열에 신경 썼다. 두 종류의 단열재에 단열 벽지까지, 약 40㎜ 두께의 단열층을 만들었다.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내부 열이 바깥으로 쉽게 빠져나가지 않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런데 난방 방법이 문제였다. 태양광 전지판을 설치해 전기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되도록 전기를 쓰지 않기 위해 배제했다. 전기라는 매개를 거쳐 에너지원이 기계를 작동하는 방식은 에너지원에서 곧장 기계 작동으로 가는 경로보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에서 효과가 좋다는 등유 난로도 고려했지만, 좀더 자연에 가까운 방식을 찾기 위해 양철 숯불화로를 선택했다.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밀폐된 공간에서 배출된 일산화탄소는 산소 부족을 일으켜 위험한 방법이란다. 자기 전에 밖으로 빼놓아 천만다행이었다. 다음에는 자투리 목재를 연료로 하는 화목난로를 실험하기로 했다.

졸업하면? 생태적 삶을 살아낼 준비 중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한적한 마을로 산책을 나섰다. 앨리스가 한 농지를 가리키며 저곳이 ‘힐링 스테이’를 할 곳이라고 했다. 요가와 명상을 특색으로 한 체험프로그램인 ‘힐링 스테이’는 고성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먹거리를 자급하며 살려는 앨리스의 오랜 꿈이다. 오는 3월 `비전화 제작자 과정'을 졸업하면 서울과 고성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 것으로 그 꿈을 시작하려 한단다.

먼 미래의 꿈으로만 여기던 일을 현실로 옮길 힘이 어느새 생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계사로 일했던 앨리스는 돈도 많이 벌었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건조한 날들을 보내다 결국 사표를 내고 떠난 여행에서 요가를 만났다. 개인 수행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요가도 내 삶의 목적은 아니잖아.” 좀더 자유롭고, 생산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기술도 동료도 없었던 앨리스는 비전화공방이 ‘바라는 삶을 살아낼 힘을 기르는 곳’이라기에 찾아왔다. 9개월이 지난 지금, 그렇게 바라던 삶을 살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

오후에 바닷가로 향했다. 한적한 송지호 해변을 거닐다 캠핑카로 돌아왔다.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다른 소리는 사라지고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만 남았다.

“졸업하면 뭐하면서 살고 싶어?” 홍이 운을 떼더니 자기는 ‘바이웨이트숍’(무게 따라 값을 매겨 파는 가게)을 운영하고 싶단다. 일회용 포장 용기를 쓰지 않고, 원하는 만큼 채소나 곡물 등의 무게를 달아 가격을 정하고, 직접 가져온 용기에 담아가는 친환경 식료품 가게다. 사실 일로서 접근하기보다 쓰레기를 최소화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했다. 줄곧 원하던 생태적이고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하겠다며 의지를 다진다.

20대를 건축과 환경 분야에 몸담았던 홍은 제도화된 틀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헤맸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궁극적 목적이 경제 성장으로 설정된 이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추구하는 바와 자신의 현실 생활 사이에서 괴리감만 느낄 뿐이었다. 고민을 안고 비전화공방에 왔던 홍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속도는 몰라도 방향은 맞다는 느낌에 마음이 더는 힘들지 않아.”

지난 14일 강원도 고성군의 송지호 해변에 도착한 캠핑카. 남수정씨 제공

고장난 캠핑카를 철물점에서 고치다

2박3일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캠핑카로 도로를 달리는데, 전면 창 위로 뭔가 나풀거린다. 자세히 보니 캠핑카 앞부분에 대어놓은 얇은 나무판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갓길에 차를 세우고보니 나무판은 완전히 떨어져 바로 수리해야 했다. “당황스럽긴 한데 그렇게 걱정되진 않아. 내 손으로 다 만들었기 때문에 고치면 되겠다 싶어.” 앨리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을 전문가에게 맡겼거나 작동원리도 모르는 첨단장비라면 고장은 곧 큰일이지만, 제품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에 부품만 구할 수 있다면 언제든 스스로 수리할 수 있다. 마침 단디가 아는 철물점이 홍천군 내촌에 있어 나사 몇 개와 나무판까지 얻어 바로 고칠 수 있었다.

반갑게 맞아준 철물점 주인 부부와 근황소식을 나누는데, 10년 만에 만난 얼굴을 보는 눈빛이 참 따뜻했다. 고장 덕분에 오랜 인연을 다시 만난 것이다. 돌아보니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첫날 나무집을 트럭 위로 옮길 때 기꺼이 도와준 행인, 인제군에서 트럭 뒷바퀴가 도랑에 빠져 쩔쩔매고 있을 때 나타난 주민, 온갖 캠핑 장비를 빌려준 앨리스 지인 부부, 장소며 밥이며 아낌없이 내어준 앨리스의 할머니. 새삼 이 여행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난 것임을 실감했다. 비전화공방에서 추구하는 자급자족의 삶 역시 이와 닮았다. 혼자 모든 것을 생산하며 고립된 채 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생산하고 관계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삶.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자립이다.

남수정 ‘비전화공방 서울’ 제작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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