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다시 아날로그 음악 붐…오래된 음반가게도 재조명

돌레코드 since1975ㅣ서울음악사 since1971

등록 : 2017-11-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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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째 영업, 서울시 ‘오래가게’ 선정

“사라진 음반가게의 살아 있는 역사”

서울음악사 ‘현존 최장수 음반점’

46년째 한자리…CD·테이프 전문

돌레코드 ‘7080세대의 ‘LP 보물창고’

1975년 리어카상으로 시작해

20만장 넘는 ‘음반 라이브러리’

개그맨 아들, 3대 가업 승계 중


40년 넘게 한자리에서 음반을 팔아온 돌레코드와 서울음악사는 한국 대중음악 변천사의 살아 있는 화석 같은 존재들이다. 돌레코드 주인 김성종(왼쪽)씨는 이른바 ‘빽판’ 시대를, 서울음악사 송인호(오른쪽)씨는 70~80년대 붐을 이룬 카세트테이프 시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 스트리밍서비스 또는 다운로드로 음악을 듣고 ‘소유’하는 시대다. 젊은 세대에게 바이닐(LP 레코드판)이나 시디(CD), 테이프 같은 물리적 형태의 음반은 구시대의 낯선 ‘유물’이다. 한때 “전국적으로 6만여개”, 서울에는 “500m 거리마다 한곳씩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았던 음반가게 역시, 서울은 중고 엘피(LP, Long Playing)판을 파는 가게를 중심으로 30~40군데 정도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물리적 형태의 음반’은 머지않아 역사 속으로 완전히 퇴장하는 것일까?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꼭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지는 않는다. 디지털 대세 속에서 아날로그 음악의 대표선수인 바이닐, 즉 엘피 붐이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전 세계 엘피판 판매량이 199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제잡지 <포브스>는 올해 엘피 시장 규모를 약 10억달러로 추산하는 등 ‘엘피 부활’이 일시적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아날로그의 반격은 음반시장 규모 세계 8위인 한국에서도 생겨난다. 엘피 판매량이 해마다 15~20% 정도 늘고 있다. 한류 스타 방탄소년단의 음반이 100만장 넘게 팔리면서 ‘김건모 200만장’ 신기록에 도전장을 던진다. 국내 생산이 중단된 지 13년 만에 바이닐 제작 회사가 새로 문을 연 것은 이런 시장 흐름을 탄 것이다. 아직은 골동 수집 취미의 측면이 강하지만 인터넷상의 엘피 거래량과 가격 오름세는 아날로그 음질과 음악 소유 방식에 대한 대중들의 감각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이런 추세 때문일까? 지난 9월 서울시가 종로·을지로 일대의 점포 가운데 30년 이상의 역사, 2대 이상 계승, 무형문화재 지정자 운영 등의 자격 조건을 갖춘 ‘오래가게’(오래된 가게)를 39곳 선정했는데, 이른바 ‘사양산업’으로 꼽히는 음반가게가 2곳이나 포함됐다. 1971년 문을 연 서울시청광장 지하상가의 ‘서울음악사’, 1975년 노점상으로 시작해 전설적인 레코드가게의 반열에 오른 청계천 황학동시장의 ‘돌레코드’이다. 전자는 현존하는 “최장수” 음반가게이고, 후자는 청춘 시절 “음악 좀 들었다”는 7080세대들이 ‘보물창고’로 여겼던 곳이다. 번창하던 음반가게가 불과 한 세대 만에 거의 자취를 감춘 엄청난 기술혁명 속에서 40년 넘는 세월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인이 지키고 있는 음반가게가 아직도 있다는 게 기적 같기도 하다.

#엘피 키즈의 고향, 돌레코드

청계8가 황학동 벼룩시장 인근의 돌레코드(중구 마장로9길 49-29)는 음반 애호가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왠만한 음반수집가, 유명 연주인, 대중음악 관계자치고 한번쯤 돌레코드를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서울시가 돌레코드를 오래가게로 선정하면서 내놓은 자료에도 “197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매장 곳곳마다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에 형성된 매장 양 벽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매장 깊숙이 들어앉은 주인장 자리 옆쪽의 창고방 두칸에 박스째로 들어찬 음반들은 이 가게가 쌓아온 연륜과 공력을 웅변한다. 20만장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각종 장르의 음반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라이브러리를 이루고 있다. 주인 김성종(62)씨는 “기자들이 찾아와 묻길래 그간에 들인 거래 시간과 거리를 따져봐서 엘피 15만장, 시디 5만개 이상일 거라고 얼추 말했는데, 사실 직접 세본 적은 없다”고 말한다. 약 3000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는 단골손님 김종술씨는 “20여년 이상 돌레코드를 드나들었지만 여기서 구하지 못한 음반이 거의 없었다”고 돌레코드의 아카이브(보관소) 규모를 ‘증언’한다.

돌레코드에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턴테이블에 엘피판을 걸어놓고 추억의 명곡을 들려준다.

돌레코드는 1975년 리어카 노점을 하던 성종씨 어머니(작고)가 노란색 두부 상자에 카세트테이프를 담아 팔기 시작해, 온갖 장르의 레코드가 거래되고 만들어지는 도매상으로, 복제음반 제작상으로 커졌다고 한다. 돌레코드 성장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레코드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고수로 손꼽히던 김세환(56·회현지하상가 안 서점 겸 음반가게 ‘클림트’ 주인)씨다.

사실 성종씨 모자는 처음에는 음악에 문외한이었다. 돌레코드라는 상호조차도 바둑 고수였던 성종씨가 까만 바둑돌과 레코드판이 흡사한 데서 착안했을 정도였다. 대학 진학도 마다한 채 “음악에 미쳐” 전국의 레코드가게를 순례하다시피 하던 세환이, 음악다방 디제이가 되려고 돌레코드를 떠난 점원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 ‘전설’의 시작이다. ‘소년 고수’ 김세환은 성종씨의 표현대로 “돌레코드를 위해 나타난 귀인”이 되어 돌레코드를 일약 엘피계의 명소로 만들었다. 성종씨에 따르면 “세환이가 찍은 곡은 백발백중 히트했다.” 가게가 너무 잘되자, 이른바 ‘빽판’(무단복제 음반)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당시는 외국 음반에 대한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빌보드 차트 200위쯤에 걸린 노래를 세환이가 찍어요. 원판을 구해다 복제판을 내놓을 즈음엔 차트 맨 위에 가 있어. 그런 식이니 안 팔릴 재간이 있나.”

돌레코드 가게를 빈틈없이 채운 엘피와 시디. 모두 20만장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87년 지식재산권 보호가 강화되면서 동네 레코드가게의 ‘좋은 시절’이 끝나고,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다운로드가 본격화되면서 도매상과 제작사들의 ‘전성시대’도 저물어갔다. 돌레코드 역시 2000년대 이후에는 중고 레코드 전문점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정든 단골들과 애호가들에게 “오래됐지만 여전히 좋은” 음반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꿈은 머지않아 다가올지 모를 ‘엘피 르네상스’. 성종씨는 그런 희망으로 개그맨인 아들을 “꾀어” 가업 승계를 위한 ‘수련’을 받게 하고 있다.

성종씨는 40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추억과 20여만장의 음반으로 남은 ‘가업’에 애착이 크다. “늘 찾아주는 단골들, 늘 새롭게 나타나는 젊은이들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분야는 사람이 좋다. 음악이 좋아 레코드가게를 차렸다가 손턴 사람 가운데 돈 떼먹고 간 사람이 하나 없다. 그런 사람들의 좋은 기운을 자식 세대에게 넘겨주고 싶다.”

엘피 수집 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글쎄, 희귀 판이다 뭐다 해서 값만 올리고, 정작 좋은 판은 더욱 깊이 숨어버리게 하는 건 아닌지… . 골동 취미보다 음악적인 면에서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음악 장사하는 편에서는 그게 장사도 잘되고 보람도 있는 길이다.”

#카세트테이프 세대의 추억-서울음악사

서울시청광장 지하도상가 125호 서울음악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반가게”이다. 1971년 말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46년째 같은 자리에서 주인 송인호씨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지하도 입구 쪽의 5평 남짓한 사다리꼴 공간에 카세트테이프와 시디가 가득하다. 흘러간 가요와 팝, 영화음악, 클래식 등의 장르를 고루 갖춰놓았다. 주로 찾는 손님은 옛날 단골들, 가요를 즐기는 어르신들이라고 한다. 가끔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가수나 음악 테이프 수집 차원에서 찾는다. 주인 송씨는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매출은 “하루 10만원쯤이면” 만족한다.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은 꺼졌지만 트로트 가요 테이프를 찾는 손님은 아직 있다고 한다. 패티김 카세트테이프가 예전의 인기를 아는지 진열장에 남아있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송씨는 베트남 참전군인. 고교 시절 밴드부원이었던 그는 베트남전 특수로 외제 카세트테이프 재생기가 국내에 소개돼 테이프 음악이 유행하자, 제대할 때 일제 녹음기 2대, 카세트테이프 24개 등을 들여와 레코드가게를 시작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카세트테이프를 이용한 각종 녹음 상품이 인기를 끌면서 레코드가게는 호황을 맞이했다. 장사가 잘되자 도매상의 ‘갑질’에 맞서 음반소매상연합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직접 제작에도 손을 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성가 테이프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테이프 참 많이 팔았어요. 그걸로 자식들 다 공부시키고 집도 장만했으니.”

제작이 중단된 시디. 한번 팔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송씨는 “요즘은 테이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장사는 잘 안되지만” 가게를 접을 생각은 없다고 한다. “테이프가 팔려나간 자리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빈 채로 남는 게 허전하지만, 찾아오는 손님과 음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좋아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엽니다.”

4년 전 아내와 사별한 그에게 희망사항이 있다면 개업 50주년을 함께해줄 여자친구가 생기는 것이다.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도 “기사에 절대 쓰지 말아 달라”는 나이 탓일까? 그가 물었다. “기자님은 아세요? 유행가라는 말이 언제 생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잘 지었어요. 지나고 보니 장사도 인생도 다 유행가예요.”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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