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인사동 터줏대감, 100년 전통의 붓가게

구하산방 since 1913

등록 : 2017-09-14 15:13 수정 : 2017-09-1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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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순종도 이용했다는

‘전설’의 붓가게

한·중·일 1천여가지 서화재료 가득

가키타 노리오가 가게 열어

일제 때부터 지필묵 가게로 명성

김은호·이상범·이응로·김환기 등

당대 명사들 드나들어

해방 뒤 우당 홍기대가 물려받고


당숙 홍문희씨에게 넘어간 뒤

현재는 그 동생 수희씨가 운영

인간문화재가 온종일 붓 만들어도

10만원 벌이 못 하는 현실 개탄

구하산방 백년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홍수희(67) 대표는 필방을 위해서라도 붓과 종이 기능장 등 전통문화 명인들을 보호·지원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호소한다.

#서울 인사동은 본래 ‘문방사우’의 거리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40여곳의 크고 작은 필방들이 어깨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던 인사동이 외국인들을 호객하는 관광의 거리가 되면서 붓과 종이, 먹과 벼루는 기념품과 화장품, 식당과 커피 가게에 자리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어 있다. 외세 침탈과 내전, 급격한 서구화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중국 베이징의 ‘리우리창’(유리창: 전통 문방구 거리)이나 일본 교토의 ‘규쿄도’(전통 문방구점)의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이 선비의 나라, 문인의 나라였다는 자부의 자취마저 부박한 상업주의에 밀려 사라져간다는 것은 애석함을 넘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제 인사동에는 10여곳의 필방이 겨우겨우 남아 있다. 이마저도 앞서서 인사동을 떠난 필방의 운명을 따를지, 아니면 이순신의 열두척 배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좁혀서 말하면 서울시장과 그의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중 한 가게를 찾아가 본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공평동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있는 ‘구하산방’(九霞山房)이다. 인사동에서 전문 서화 재료를 파는 필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구하’ 또는 ‘구하산’은 옛 중국 시에 보이는 말로, 신선이 노니는 하늘 뜨락, 또는 하늘 정원 속의 깊은 산, 즉 ‘선계’를 의미한다.

 

#구하산방은 1920년대를 전후하여 처음 문을 열었다. 100년의 전통답게 그동안 수많은 서화가, 한학자, 시서화에 능한 다방면의 명사들이 드나들던 문화 명소였다. 전국의 명인, 명장들이 만드는 붓과 종이를 팔았을 뿐 아니라 중국, 일본, 타이완의 명품들을 우리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다리 구실도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보자. 다양한 크기와 품질의 붓과 종이, 먹과 벼루, 연적, 필세(먹이나 물감이 묻은 붓을 빠는 그릇) 등 갖가지 문방품, 수많은 색깔의 안료, 전각석 등이 빈틈없이 진열돼 있다. 오래된 가게답게 몇몇 글씨와 그림도 예사롭지 않다. 가게 안쪽 정면에는 ‘고순어용’(高純御用)이란 전서체 글씨가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서예가 정향 조병호(1914~2005)가 구하산방과의 60년 인연을 기념해 써준 글씨라고 한다. “고종과 순종도 즐겨 사용했다”는 뜻이니, 구하산방의 물건을 왕실 납품의 반열에 둔 칭찬이다. 정향은 고 신영복 선생이 대전교도소 수감 시절에 붓글씨를 가르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주인장 책상 앞 벽에는 중국 근대의 대화가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의 유명한 새우 그림이 비매품 딱지를 붙이고 있고,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이 서예가 우당 유창환(1870~1935)에게 쓴 행초 편지도 보인다. 구하산방의 세번째 주인 홍문희(작고)의 난초 그림, 현재의 구하산방 대표 홍수희(67)씨의 전각 작품도 눈에 띈다.

구하산방의 전각 상품.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부유층을 상대로 고급 물품을 거래하는 상점은 대부분 일본인이 개업했다. 구하산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히로시마 출신의 가키타 노리오(枾田憲男)라는 사람이 처음 문을 열었다. 가키타는 “동양전통문화에 조예가 있는” 상인으로, 부산에서 고급 지필묵 수입가게인 ‘구하당’(九霞堂)을 차렸고, 이 가게가 장사가 잘되자, 서울로 진출해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에 지점을 낸 것이 오늘의 구하산방이다. 해방 후 가키타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사람이 고미술상인으로 유명한 우당 홍기대(96)이다. 홍옹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1935년 14살의 나이에 구하산방의 점원이 되면서 고미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구하산방 초창기의 일은 우당의 회고록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2014)에 잘 나와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가키타가 부산에서 구하당을 연 것이 “1920년 무렵”인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구하산방의 개점 연도가 1913년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뒤 고미술상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우당은 6·25 전란으로 도자기를 비롯한 수천점의 고미술 수집품이 잿더미로 돌아가자, 명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구하산방을 옮겼다. 구하산방은 이후에도 낮은 임대료를 찾아 안국동, 견지동, 공평동 등지를 전전하다 2006년 현재의 인사동 네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구하산방은 우당이 고미술 거래에 전념하게 되면서 1972년 우당의 손아래 당숙인 홍문희에게 넘어갔고, 1987년부터 홍문희의 동생 수희씨가 운영하고 있다.

#구하산방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전문 지필묵 가게로는 서울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 주 고객은 일본인들이었지만, 한국의 유명 화가, 서예가들도 애용했다. 우당의 회고록에는 초창기 구하산방의 고객으로 이당 김은호(1892~1979), 청전 이상범(1897~1972), 소정 변관식(1899~1976)과 같은 대가의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해방 후에는 고암 이응로(1904~1989), 도천 도상봉(1902~1977), 수화 김환기(1913~1974) 등이 유명하다. 위창 오세창(1864~1956), 구룡산인 김용진(1878~1968), 석정 안종원(1877~1951), 성재 이관구(1898~1991) 같은 한학자, 서화가들도 구하산방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우당은 “구하산방은 전문가용의 고급 서화재료와 고미술을 같이 팔았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구하산방을 모르면 문인이나 화가가 아니라는 말이 날 정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하산방의 내부 모습. 각종 안료와 문방품들이 가득하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오늘날에도 구하산방에서 다루는 서화재료는 1000여 가지에 이른다. 1만원 미만의 학습용 붓에서 수백만원짜리 최고급 서호필(쥐수염으로 만든 붓)까지 글씨용과 그림용 붓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국내외 유명한 장인들이 만든 명품을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가교 구실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구하산방은 초창기부터 자신들이 파는 붓에 구하산방이란 상호를 새겨 팔았는데, 현재는 중국에 세운 공장에서 생산한 것을 판다. 홍 대표는 “국내에서는 점점 양질의 재료를 싸게 구할 수 없고, 인건비마저 올라 중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홍 대표는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형이 운영하는 구하산방에 들어왔다.

홍 대표는 인터뷰 내내 전통 장인들과 필방 경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가게에 들르는 장인들마다 한숨이에요. 노가다만도 못하다고요. 명색이 인간문화재인데 종일 붓을 만들어도 하루 10만원 벌이도 못 되니….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우리 손으로 붓 한 자루, 한지 한장 만들지 못하는 때가 닥칩니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그는 시급한 일로 몇 가지를 거듭해 외친다. 첫째, 학교교육에서 서예 교육을 부활시킬 것, 둘째 인사동에 베이징의 리우리창 같은 전통 예술가를 위한 전문상가나 거리를 조성할 것, 셋째 오래된 가게에 세금 좀 깎아줄 것.

“가게가 100년 가는 걸 보면 장사가 잘되는 거 아니냐? 그러니 세금 더 내라. 이거 말이 됩니까?”

참고로 베이징의 리우리창은 500년 역사를, 교토의 규쿄도는 30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데, 그들의 세금 명세가 궁금하다.


고미술상으로 더 유명했던 구하산방

상점 이름 ‘구하’의 유래 

구하산방은 지필묵 가게로 문을 열었지만 조선 고미술품 상점으로 더 유명했다. 창업자 가키타 노리오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구하산방이라는 상점 이름도 일본 미술에 끼친 조선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일본 에도시대 화가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1723~1776)는 ‘일본 문인화의 비조’로 추앙받는 대가인데, 그의 호가 바로 ‘구하’ 또는 ‘구하산초’(구하산의 나무꾼)였다. 이케노는 김유성 등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조선 화원들에게서 조선 진경산수화와 문인화 기법을 흡수해 일본 남종화에 접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키타가 “묵객의 풍도가 있어 하이쿠를 잘 지었고”, 동생도 일본 미인도를 그리는 화가였음을 생각할 때, 평소 조선 미술의 우수성과 관련된 이케노의 일화를 알고 있던 가키타가 이케노의 호에서 조선 미술품을 거래하는 상점 이름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일본인 고미술 애호가들 중에서도 학식 있는 이들은 이케노와 조선 미술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터이기에 구하산방이라는 상점 이름은 일본인 상대의 조선 미술품 가게로서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구하산방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겠지만, 조선인 대수집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나 고미술상인 우당 홍기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호에 나서게 한 공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구하산방 같은 일개 필방의 이름에도 나라를 잃은 역사의 명암이 배어 있다.

고미술 거래와 구하산방 

우당 홍기대는 어린 나이에 구하산방에 들어가 가키타와 마에다 사이치로라는 조선 도자기 수집가에게 도자기 감정과 거래 기술에 대해 배워 훗날 유명한 고미술상으로 성장했다.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을 보면, 구하산방에는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고미술상인, 해방 후에는 그레고리 헨더슨 같은 미군정 관리나 외국 외교관들이 드나들며 우리 문화재를 수집했다.

우리나라 수집가로는 전형필, 소전 손재형(1903~1981) 등이 유명하고, 인촌 김성수(1891~1955), 창랑 장택상(1893~1969) 같은 정치인 이름도 보인다. 박정희 정권 때는 김형욱·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같은 권력자들도 구하산방에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화가 김환기는 조선 백자에 달항아리라는 예쁜 이름을 처음 붙여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당에 따르면 “수화(김환기)는 마음에 드는 항아리를 산 날이면 그것을 가슴에 안고 명동 가게에서 성북동 집까지 걸어갔다.”

기업인으로는 삼성 이건희 회장 부부가 있다. 우당은 30대의 재벌 2세 이건희에게 도자기 보는 눈을 틔워주고, 좋은 물건을 소개해주는 등 훗날 삼성 리움미술관이 다수의 명품으로 채워지는 데 일조했다. 우당은 손꼽을 만한 고미술상인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말했다. 미술관, 박물관 건립 등 공익적 목적을 가진 수집가에게 좋은 물건을 몰아준다. ‘험한 일’(불법이거나 반사회적일 수 있는 거래)은 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80년 고미술계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꼽는다면, 결국 고객의 수집을 돕느라 거래한 물건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다시 만날 때이다. 궁극적으로 좋은 문화재는 한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아끼고 즐길 수 있을 때 더욱 그 가치를 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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