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런 사람들

등록 : 2025-07-17 13:04 수정 : 2025-07-1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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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_No.04’ Charcoal(with ink) on Paper, 53.5 cm x 76,5 cm

‘케이’(K) 붙은 모든 게 유행이란다. 케이팝, 케이뷰티, 케이푸드 등. 그걸 일선에서 일군 사람들은 얼마나 뿌듯할까 싶은데, 현상을 ‘경험’하는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 국제학교에서 놀림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신기하다.

이란과 전쟁 중이던 이라크에서 살 때다. 같은 반 아이들은 손가락을 눈에 가져가 위로 잡아당기며 “중국인은 이렇고”(Chinese is this), 내리면서는 “일본인은 이런데”(Japanese is this) 했고, 마지막으로 일자 수평으로 찢으며 놀림을 결론지었다. “너는 이래”(And you are this)라고.

요즘이라면 인종차별에 대해 교육도 받았을 테고 어디든 일러바쳤을 테지만, 그땐 그게 차별인 줄도 모르는 일고여덟 살 아이는 그저 이름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것만 난처했다. 그래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나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 후 한국과 국외를 들락날락할 때마다 한국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고, ‘케이’라는 표현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십몇 년 전 말레이시아 친구의 서울 방문 때였던 듯하다. 친구가 ‘케이드라마’를 칭송하며 궁궐을 꼭 가보고 싶다고 해 경복궁에 데려갔다. 방글방글 신나서 사진을 연신 찍던 친구는 연못에 다다르자 엉뚱하게도 여기가 드라마 속 왕비가 빠져 죽은 연못 같다는 거다. 저기 저쯤에서는 왕비를 보호하려던 그 남자가 피를 질질 흘리며 쓰러졌고, 저 장소는 왕이 살해당한 거기가 분명하다며 환호했다.

이렇게 예쁜 공간에서 왜 누구 죽은 장면만 떠올리느냐, 따라다니며 타박하다 보니 새삼 상상 속 이야기뿐 아니라 여기가 실제 사람들이 숨을 쉬었던 장소였지, 싶었다.

삶의 흔적이, 숨결이, 건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이 일이 며칠 전 불쑥 되살아난 건 택시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기사로부터 삼성동 ‘차관아파트사거리’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파트 이름이 참 특이하네요”라고 하니, 1970년대 미국에서 차관을 받아 지어서 그렇게 불렸고 재건축돼 없어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는 거다. 건물은 가고 이름만 남았구나,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대규모 인프라도 아닌 아파트 단지 하나조차 자력으로 짓지 못해 외국에서 자금을 빌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순간 어린 시절, 네덜란드 관광지 대기 줄에서 서양인 할아버지와 대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 친구들과는 달리 그 할아버지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 했더니 뜻밖에도 알은체했다. 반색하며 자기는 한국전에 참전했단다. 그래서 한국을 잘 안다고. 어린 눈에도 꾀죄죄한 잠바를 뒤적여 무슨 협회인지 로고가 찍힌 때 묻고 낡은 볼펜을 꺼내어내 손에 쥐여줬다. 얼떨결에 받아놓고 당황했는데,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국가의 위상이든 수치든, 건물이든 지명이든, 지금 내 앞에 남아 있으니 영원할 성싶어도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기억을 어루만지다보니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시에스(C. S.) 루이스의 말이 생각났다. 루이스는 국가, 문화, 예술, 문명—이런 것들은 유한하며, 사람의 생명에 비한다면 하루살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우리가 농담을 건네고, 함께 일하고, 결혼하고, 외면하고, 때로는 이용하는 이들이야말로 불멸의 존재라고.

우리는 모두, 이어받든 이어받지 않았든, 앞서 산 사람들이 각자 열심히 살아낸 숨결과 흔적 위에서 오늘을 산다.

그렇다면 나의 숨·흔적 또한 당연히 누군가에게 닿지 않겠는가. 나와 스치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우린, 그런 사람들이고.

글·그림 윤지영(‘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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