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어이 피어나는 꽃처럼

등록 : 2025-04-10 13:39

크게 작게

나이를 먹을수록 너그러워지고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믿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 꽤 나이를 먹고 둘러보니 그 믿음은 조금 무너진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집에 빠져 어리석어지는 경우를 자주 봤으니 그 믿음은 일반 명제가 아닌 셈이다.

대신 ‘나이를 먹을수록’ 뒤에 붙일 수 있는 특징을 하나 찾아냈는데, 꽃을 좋아하게 된다는 점이다. 대체 왜들 그렇게 꽃을 보러 멀리 다니고 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 계정 프로필로 설정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꽃이 세속의 거친 풍파의 흐름을 묵묵하게 견디며 스스로 피어난다는 것, 홀연히 사라짐에도 다시 내년의 약속을 지키기 때문 아닐까.

화려하든 수수하든 꽃은 피고 지는 것으로서 자신을 증명한다. 소나무처럼 평생을 푸르지 않아도, 내년 같은 계절에 다시 피어나겠다는 의지로 한 해를 버티는 고고함은 역설적으로 소리도 없이 한결같고 무심한 듯 초연하다.

퇴계 이황 선생 역시 40대 후반 풍기군수 시절 소백산에 올라 철쭉 바라보기를 즐겼다고 한다. 퇴계가 최초로 사액서원을 만들자고 조정에 건의한 것도 이 시기였고 곧이어 관료의 삶을 떠나 향토의 선비로 돌아가기를 결심했으니, 어쩌면 그 결단에는 철쭉이 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모두 퇴계와 같은 영감을 얻진 못할지라도 지친 삶의 한순간 철쭉이 필요하다. 다행히 노원에는 21세기 서울의 삶에 걸맞은 철쭉 군락지가 있다. 많은 구민의 사랑을 받는 불암산 초입 ‘불암산 힐링타운’에 있는 철쭉동산이다. 한때 무허가 건물과 무단 폐기물로 훼손돼 있던 이곳은 약 8200㎡ 규모의 너른 구릉에 10만 주 이상의 철쭉이 빼곡하다. 철쭉이 자리를 잡자 철쭉보다 많은 사람들이 철쭉을 보러, 또는 철쭉의 개화를 축하하러 모여들었다. 지난해에는 약 2주간의 ‘철쭉제’에 23만여 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철쭉동산을 소개하자면 우선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무장애 산책로가 설치돼 영유아, 휠체어 장애인, 어르신, 반려견까지 그야말로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깝다. 꽃을 사랑하는 중장년은 철쭉을 보러 멀리도 다니겠지만 이곳은 서울에 있으니 온 가족의 주말 일정을 온전히 빼지 않아도 좋다.


게다가 풍성하다. 철쭉동산이 자리한 불암산 힐링타운에는 사계절 내내 나비를 만날 수 있는 나비정원, 심신을 치유하며 숲의 정취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산림치유센터, 정원문화를 선도하는 정원지원센터, 불암산 전체를 조망하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카페 포레스트(4rest), 장애인도 엘리베이터로 오를 수 있는 전망대까지 다양한 시설이 함께 조성돼 있다. 지난해에는 여기에 피크닉장이 개장됐고, 올해는 갤러리 아트포레까지 추가되어 한나절의 온전한 힐링 프로그램이 빼곡하다.

“버려진 땅을 재생하여 모두에게 개방된 가까운 공간, 천혜의 자연 자원을 도시의 삶에 가까이 끌어와 주민들의 일상에 녹여내는 공간. 그곳에서 누리는 문화와 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지난 6~7년 동안 노원구가 꾸준히 해온 정원도시의 지향점이다.

당현천과 우이천 벚꽃이 벌써 져버렸어도, 초안산 수국이 아직 만개하지 않았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철쭉이 가장 멋진 순간, 당신 봄날의 가장 멋진 순간을 장식해줄 ‘불암산 철쭉제’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여가 공간’인 불암산 힐링타운은 이 기간 ‘여가의 모든 것’이 된다. 동화나라 야외도서관, 버스킹과 퍼포먼스 공연, 목공예 체험 같은 즐길거리들이 꽃, 나무, 나비와 같은 볼거리들과 어우러져 불암산 한편을 가득 메운다.

‘불암산 철쭉제’는 문화도시 노원의 5대 대표 축제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오는 행사다. 한 해의 축제를 시작하는 철쭉제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역동적인 몸짓과 휘황찬란한 조명이 없이도 자연의 특별한 힘이 맥박을 뛰게 한다. 자연과 문화의 어우러짐이 가장 돋보이는 철쭉제는 문화 불모지 노원이 왜 문화도시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지, 곳곳에서 펼쳐지는 정원도시 조성에 노원이 어떻게 앞서 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웃음은 전염성이 있다고 한다. 활짝 핀 철쭉은 활짝 웃는 사람을 닮았다.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며 억지로라도 웃자고들 하는데, 자연이 선사하는 웃음을 함께 누려보면 어떨까. 봄볕이 꽃을 웃게 하고 꽃은 사람을 웃게 한다. 다 같이 웃고 있으니 쑥스러워 말고 함께 웃어보라며 나비들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승록 노원구청장

지난해 봄 불암산 철쭉동산에 철쭉이 활짝 핀 모습. 노원구 제공

사진 노원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