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공유
샤로수길
딸의 나이 23살. 웬만해선 나와 장단이 잘 맞는 편이지만 딱 하나 좁혀지지 않는 틈이 있다. 마라탕이다. 나는 도무지 이 음식이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딸은 그게 내 선입견이란다. 엄마는 마라탕이 몸에 나쁠 거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나?
딸아이 논리로는 마라탕은 채소가 많이 들어가는데다 튀긴 음식이 아니고, 매운 게 싫으면 백탕이든 1단계든 맵기를 얼마든 조절할 수 있으니 오히려 건강식이라는 것이다. 내 세대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친구들이 모이면 이구동성으로 요즘 애들은 왜들 그렇게 마라탕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왜들 그렇게 집에 있으면서 마라탕을 시켜 먹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마라탕 세대차가 비단 우리 집만의 일은 아닌 모양이다.
서울대입구역 앞
“엄마, 나는 엄마가 마라탕을 좋아했으면 정말 좋겠어. 이 맛있는 걸 엄마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아?” 딸아이 하는 말이 하도 예뻐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까짓거 한번 먹어보자. 그리하여 샤로수길로 나가게 되었다. 마라탕 때문이라면 더 유명한 곳이 많겠지만 솔직히 이름이 주는 호기심이 컸다. 언젠가 아이 입에서 샤로수길에서 친구들을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다. 샤로수길은 2호선 서울대입구역 주변 상권으로, 서울대를 상징하는 ‘샤’와 ‘가로수길’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내가 딸아이 나이였을 땐 신림역 주변에 뭐가 많았지? 서울대입구역은 별게 없었던 것 같은데, 관악구청이 신축되고 주변에 오피스텔이 많아지면서 이곳에 지금처럼 번화한 상권이 형성됐다. 특별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간 내게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분위기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마라탕을 빙자해 딸아이와 데이트를 즐길 수 있으니 충분히 즐겁다.
마라탕
마라탕 도전은 뜻밖에도 싱겁게 끝났다. 압도적으로 20대 여자 손님이 많은 식당을 뚫고 들어가 겁도 없이 호기롭게 2단계 매운맛으로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두근두근 긴장됐는데, 대세라는 걸 무시할 수 없는 겐지 그사이 내 입맛이 변한 건지 반 이상 남길 줄 알았건만 웬걸. 심지어 꽤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마라탕을 먹어보고 알게 됐다. 나는 3단계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비록 재채기를 3번 연거푸 해야 했지만, 도전 자체가 즐거웠다. 다음엔 고수에도 도전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골목
밥 먹고 차 마시는 것만 했다면 시시했을지도 모를 샤로수길 데이트가 알차고 풍성했던 비결은 비누공방 체험 덕분이다. 메인 골목엔 식당과 카페가 대부분이었지만 비싼 임대료를 피해 서울대입구역과 낙성대역 사이 주택가 쪽으로 샤로수길은 조금씩 더 확장되는 중이다. 메인 상권에 인형 뽑기나 방 탈출 게임 같은 놀 거리가 있다면, 다음 골목, 그다음 골목엔 비누공방, 나만의 향수 만들기, 퍼스널 컬러 찾아보기, 실버 반지 만들기, 심지어 전통 활쏘기 체험장도 있다. 나는 비누공방을 예약하고 한 시간 반 남짓 딸과 함께 천연비누를 만들었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레시피대로 각종 천연 오일과 가성소다, 산양유, 정제수 등을 계량하고 취향껏 아로마 오일을 섞어 넣어 틀에 굳혀두고 왔다. 딸과 함께 한 시간 반 동안 무언가를 배우며 깔깔댄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가족이 거의 1년 사용할 도합 10장의 비누까지 만들고 나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수업을 들으며 건강과 환경에 대한 인식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이 비누를 다 쓸 때까지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소중한 추억이 되살아나 행복할 것이다.
신림동 순대볶음
딸과의 데이트 마지막 코스는 신림동 순대타운으로 정했다. “엄마가 이걸 처음 먹었던 게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말이야….” 철판을 앞에 놓고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1989년으로 거슬러 간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게가 생겨나고, 가게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골목상권의 자연스러운 매력이 오늘 우리가 다녔던 곳들에 켜켜이 쌓이기를 기대한다. 30년 뒤 내 딸이 그 딸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이곳이 여전히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서울& 인기기사
-
1.
-
2.
-
3.
-
4.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