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기 전부터 ‘핫’했던 망원동의 숨은 그 집

망원동 토박이 김작가가 ‘강추’하는 맛집 3곳

등록 : 2017-04-0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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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리단길
“정말 종점 동네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중반, 홍대에서 우리 집에 가는 버스를 탄 친구는 말했다. 합정동을 지나 망원동에 들어왔을 때다. 좁다란 2차선 도로의 양옆은 약국, 보석상, 전파사, 세탁소 같은 동네 가게들로 빼곡했다. 신촌의 발전은 극에 달했고 홍대 앞이 융성하고 있었다. 망원동은 여전히 낙후된 곳이었다. 1980년대의 홍수로 동네 전체가 물에 잠겼고 북한에서 지원한 쌀과 시멘트 같은 구호물품들이 집집마다 왔다(그 쌀은 매우 맛이 없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도 ‘아, 망원동? 거기 툭하면 홍수 피해 나는 동네 아니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 동네에서 초·중·고·대를 다 나온 나는 그런 물음을 수도 없이 들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 홍대 앞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상수동, 연남동 같은 주변 상권들이 커질 때도 망원동이 새로운 문화권, 또는 상권이 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없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들과 자리를 가졌을 때, 20대에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나왔으니, “망원동이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못 나가는 동네지.”

그런 망원동에 사람들이 들어온다. 생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기 위해서. 장미여관의 육중완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망원시장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망리단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지난해부터 급격히 망원동의 모습은 바뀌는 중이다.

최근 홍대에서 망원동으로 오는 마을버스 안에서 어느 중년 여성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요즘 동네가 난리예요. 내가 이 동네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우리 집 앞 교차로에 차가 막히는 건 처음 봤어.” “휴일에는 시장에 안 가요. 물건 사기도 힘들어요.” 망원동의 변화는 인근 어느 지역보다 빠르지만 또한 다른 형태를 보인다. 동네가 큰데다가 오랜 주거지였기 때문에 특정 구획 중심이 아닌 여러 곳을 거점으로 하여 각자의 모양새를 보이는 것이다.

고기 선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천지양꼬치


정작 망원동 사는 사람들은 ‘망리단길’이란 별명을 싫어하지만 이 신조어가 나온 후 망원동이 ‘핫’해진 건 부인할 수 없다. 대중교통이라고는 7011번 버스와 마을버스가 전부인 이 길은 1990년대까지 망원동의 중심도로였다. 몇 대

의 버스가 2차선 도로를 지나 종점으로 향하던 80~90년대까지, 이 길을 중심으로 망원시장을 포함한 몇 개의 동네 시장이 형성됐고, 망원1, 2동사무소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던 이 도로의 시간이 멈춘 건 2000년을 전후해서다.월드컵경기장이 상암동에 들어서면서 6차선이 깔렸고 합정-망원-마포구청역이 생겼다. 지하철을 따라 도로도 확장됐고 망원동의 중심은 지하철역 주변이 됐다. 그래서 지금의 망리단길은 21세기에도 20세기 후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췄다. 지금도 전당포와 기원, 옛날 프로스펙스 간판을 만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를 전후해 홍대 앞-상수로 이어진 지역의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아티스트들이 하나둘씩 집값도 싸고 버스도 다니는 이 동네로 이사하며 그전과는 다른 주거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카페와 술집, 식당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제는 평일 저녁에도 20대가 줄을 서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복작복작한 거리가 됐다. 양장점 자리에는 카페가 생기고 동네 생선구이 가겟집이 함박스테이크 가게가 됐다. 여전히 붙어있는 전당포 간판과 2000년대의 홍대-상수를 연상시키는 공간들이 한 거리에 공존하는 모습은 묘하기 그지없다.

이 길이 뜨기 전부터 동네 주민들과 아티스트들이 저녁에 모이던 곳이 ‘천지양꼬치’다. 치킨집과 고깃집이 동네 술집의 전부였던때부터 적잖은 이들이 찾았다. 웬만한 홍대앞 양꼬치집들보다 고기의 선도도 좋고, 다른 요리들의 완성도도 높았다. 무엇보다 값이상대적으로 저렴했다. 이미 양꼬치에 익숙했던, 새로 이사 온 아티스트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이 일대에서도 가장 먼저 줄이 늘어서는 곳이 됐지만 맛은 여전하다. 행여 양꼬치가 탈까봐 테이블을 일일이 챙기는 사장님의 마음 씀씀이도 그렇다. 다만 짧은 기간에 가격이 꽤 오른 게 아쉽다. 그래도 합리적 가격에 배불리 편하게 망리단길을 즐기려면 우선 고려 대상으로 생각할 만한 곳이다.

동네 빵집 수준을 뛰어넘는

블랑제리 코팡

이 동네 사람들에겐 ‘한강 유수지’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한강공원 망원지구 진입로 일대는 본래 망원동에서도 가장 낙후됐던 지역이다. 이렇다 할 대중교통이 없었고 홍수 대책이 없던 시절, 폭우가 내리면 가장 먼저 잠기는 곳이었다. 하지만 고 조영래 변호사가 주도했던 한국 최초의 단체소송으로 보상과 홍수 대책이 완료되면서 과거의 오명은 사라졌다.

망원지구 진입로 일대는 가족 단위로 찾는 고깃집과 한산한 도로를 바탕으로 한 기사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자전거 붐이 일면서 동네 자전거 가게가 아닌 전문 ‘바이크 숍’들도 들어섰다. 나들이 철의 친구들을 위한 치맥집들은 물론이다. 어떻게 보면 망원동에서 가장 먼저 변화의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은 한산한 이 동네도 낯선 공간들이 생기고 있다.

혼자 사는 이들을 위한 반찬가게에서는 1000~2000원 단위로 그때그때 만든 반찬들을 조금씩 포장해서 판다. 카페도 겸했다.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전부였던 동네에 신라호텔-프랑스 제과학교 출신의 운영진이 경영하는 베이커리도 생겨났다. 아직은 황막한 도로변에 있는 ‘블랑제리 코팡’이다.

인근의 유명 제과점보다 값은 싼데 맛은 빼어나다. 동네 빵집에 기대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평일에는 동네 엄마들과 싱글들이, 주말에는 한강공원을 찾는 연인들이 주 고객이다. 여기서 빵을 몇 개 사먹었다. 어린 시절 망원동

을 지배했던 ‘하얀풍차’ ‘해바라기 빵집’ 같은 이름이 기억의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나왔다.

모쓰나베 등 일식 파는

호구식당

망원시장과 한강공원이라는 동네의 절대 상권 탓이었을까. 마포구청역에서 한강공원으로 뻗어 있는 옛날 개천 도로는 오랫동안 상가의 무덤이었다. 10여 년간 여기서 홍대 가는 버스에 타고 내리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가게가 생기고 사라졌다. 대부분은 늘 손님이없었다. 한때 이 동네 가족들의 외식을 책임졌던 ‘영풍가든’, 오래된 동네 해장국집인 ‘일등식당’ 정도만 빼고 말이다.

그중에서도 문 여는 가게마다 1년을 못 버티고 없어지는 극악의 터가 있었다. 망원2동 주민센터 버스 정류장 바로 앞인데도 그랬다.문을 연 지 2년 정도 되는 ‘호구식당’은 이 저주 비슷한 걸 깬 경우다. 좋을 호에, 입 구를 쓴다. 일본 후쿠오카의 명물인 모쓰나베(사진)가 주요 메뉴고 굴튀김, 가지만두 같은 일본 음식을 판다. 4인석 테이블이 두 개고, 주방에 맞닿아 있는 바를 포함해도 10여 석 정도다.

그런데도 이 집을 찾게 되는 이유는 오직 맛이다. 주문이 들어가면 작디작은 오픈 주방에서 그제서야 요리가 준비된다. 채소를 썰고 냄비에 재료를 얹는다. 성미 급한 사람은 ‘방망이 깎던 노인’ 앞에 선 ‘윤오영’이 된 기분이다.

그러나 막상 음식을 먹으면 조급했던 자신을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이 요리하고 서빙을 하니 몇 번만 가도 손님의 취향을 기억해서 음식을 변주해준다.

이 동네에 살 때 이런 가게가 있었다면, 굳이 날마다 홍대까지 가서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글·사진 김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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