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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남편 대신 경제적 가장은 어떨까요?

불쑥 사표 던진 남편 바라보는 30대 주부 “안타깝다가도 분노가 불쑥”

등록 : 2017-03-3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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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결혼 4년 차인 30대 초반 여자입니다. 최근 신랑의 퇴사 문제로 날마다 분노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냅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책임감 있는 아빠, 경제력 있는 아빠를 보며 자랐고, 남자란 그리고 아빠란 한 달에 돈 백이라도 꾸준히 가져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한 직장에 30년 근속은 당연하구요. 그게 아빠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타이밍에 나를 찾아와 위로해준 지금 남편과 예상치 못한 결혼을 했죠. 엄마의 부재를 느끼는 게 힘들어 결혼으로 도피 아닌 도피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의 책임감이나 경제력보다는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모습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선택했던 거 같아요. 그런 나의 선택이 지금은 그저 후회스럽습니다. 돈으로 쌀 사지 사랑으로 쌀 사는 게 아닌데 그땐 슬픈 감정이 앞서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신랑의 직장은 중소기업 정도 되는 회사구요. 워낙 술을 못해서 회식 자린 아예 나가질 않아서인지 점점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더니 신랑은 퇴사자 명단에 올랐고 회사는 대놓고 인신공격에 멸시를 하며 내보내려 하더라구요. 결국 신랑은 아무 결정된 것 없이 퇴사했고 백수 생활한 지 이제 3일째입니다.

신랑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커서 말도 섞기가 싫습니다. 아이가 없으니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이혼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합니다. 밤마다 영화 보는 모습, 늦게까지 자는 모습, 모든 게 무능해 보이고 부족해 보입니다. 속이 터지고 분노가 가슴속에 가득합니다. 저러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얼마나 답답하고 막연할까, 나름 4년 반 일했으니 며칠은 휴가라고 생각하게 쿨하게 둬야지 하는 마음은 잠깐, 한 달에 나가는 대출에 카드값에 생활비를 보고 있으면 도대체 저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 상황을 알긴 하는지 다시 속이 뒤집힙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요? 이현정

A.한 가정에서 생계 부양자가 실직을 하게 된다면 가족원 누구라도 마음 편할 리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감정이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을 넘어서 남편에 대한 분노나 미움으로 변하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살펴봐야 하겠네요.

당신의 내면에서는 지금 두 가지 마음이 싸우는 것 같습니다. 한편의 마음은 남편이 참 자상한 사람이고 실직이 남편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아버지상이 꽤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군요. 그 아버지가 말합니다. 남자란 모름지기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가족 부양의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마 남편의 실직으로 위기감을 느끼자 당신 내면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커진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부모상이 존재하며 그것이 평생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잘 알려져 있지요.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내면화하기 때문에 현실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느새 부모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면의 부모상은 다소 보수적이고 고루한 목소리를 반복합니다. 공부를 잘해야 성공하지,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착하게 굴어야 칭찬받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현정 님 역시 나이 많은 어른들이 함 직한 이야기를 하시네요. 돈으로 쌀 사지 사랑으로 쌀 사는 게 아닌데, 슬픔 때문에 바보같이 무책임하고 경제력 없는 남자를 선택하다니… 하면서요.


이 생각에는 두 가지 믿음이 전제돼 있습니다. 결혼은 현실적인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과 남자는 경제력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 내면의 속삭임이면서, 내면의 부모가 우리에게 거는 주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지도 않은 채 이런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그 생각의 틀에서 자신과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것을 심리학자들은 왜곡된 믿음, 잘못된 신념이라고 말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기는 믿음들이 사실은 한정된 경험에 근거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한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나 신념이 많을수록, 그리고 과장됐을수록 좌절 경험은 많아지고, 그만큼 우울과 분노도 커집니다. 무엇보다 우리 앞에 닥친 문제에 재빨리 대처하기보다는 좌절감과 분노로 전전긍긍하면서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됩니다.

왜곡되고 낡은 믿음 중에는 성 역할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남자는 모름지기’, ‘여자가 감히’ 등과 같은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성 역할에 갇힌 여성일수록 우울하다고 하네요. 여성 우울증 치료 전문가인 발레리 위펜은 <여자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에서 성 역할과 우울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돼 있어서 성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을수록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집안일의 특성이 여성을 지치고 우울하게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저는 여성들이 사회적인 일에서 도태될 때도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생존 능력을 잃는 것이니까요.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을 때, 그래서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늘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 당연히 불안하고 두려울 것이며 자존감도 낮아질 겁니다.

이현정 님, 이제 남편의 역할에 대한 신념을 내려놓으세요. 직업환경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든 한 직장에 자신의 평생을 바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 부인이든 남편이든 가능한 사람이 일해야 합니다. 혹시 당신이 전업주부라면 이참에 취업을 고려해보라고 권합니다. 취업 여성이라면 당분간 경제적 가장이 되는 것을 각오하시면 어떨까요? 부부간 성 역할을 너무 고집하지 않는다면, 상황에 따라 그와 나의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삶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훨씬 줄일 수 있으며, 경제적 자립으로 인한 자유로움도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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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미라 마음칼럼니스트·<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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