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도쿄라이프

“하루키에게 노벨상을”…신작소설 제막식까지

등록 : 2017-03-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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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저녁,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하루 종일 보던 뉴스 화면이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너무도 판이했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부터 텔레비전에서는 난리였다. 사람 키보다 훨씬 커다란 물체를 뒤덮은 하얀 천, 바로 그 천을 양쪽에서 여러 명이 잡아당기자 주위에서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마침내 그 실체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하얀 천에 숨겨졌던(?)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세계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책더미였다. 책을 쌓아놓고 그런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그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먼발치에서 흘깃 그 뉴스를 보았는데, 저녁에 뉴스 내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느 유명인의 비석 제막식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날 하루 종일 채널을 바꿔가며 그 장면이 연거푸 수십 차례 방송됐기 때문이다.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하얀 천을 덮어놓고 하나, 둘 숫자를 세어가며 거창하게 제막식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내가 아는 일본 출판계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퍼포먼스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 유럽 등지에서 ‘하루키 마니아’ 군단을 형성할 만큼 인기 있는 세계적 작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 상위권에 올라 일본인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것도 되풀이되는 일이다.

1980년대 후반쯤, 일본 작가들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출판 에이전시 대표를 우연히 나리타 공항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반가운 마음에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그 대표는 장기간 유럽 출장을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출장 목적은 자신의 에이전시에 소속된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도록 로비를 하러 가는 것. 벌써 수년째 그 같은 출장을 다니고 있다 했다. 그러면서 오에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그 같은 유럽 출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1994년, 그의 말대로 오에 겐자부로는 마침내 일본인으로서는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로써 그의 장기간 유럽 출장도 끝났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몇 년 전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이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해 또다시 장기간의 유럽 출장을 해마다 떠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얘기는 똑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탈 때까지 그 로비 출장은 계속된다는 것.

지난달 24일,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뉴스와 교양, 연예 프로그램, 공영과 민방 관계없이 비석 제막식과 같은 무라카미 신작에 대한 이벤트 장면을 며칠 동안 질리도록 보여주었다. 또한 그 책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선 독자들의 열기를 인터뷰 장면과 함께 증거 화면이라도 되는 양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아마 광고비로 치면 수십억 엔, 아니 수백억 엔의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며칠 후 다른 출판사 관계자와 얘기하면서 “그러고도 그 작품이 수백만 부가 팔리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다”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24일 이후 그 주간은 무라카미 책의 날들이었다.


이번 무라카미의 대대적이고도 거국적(?)인 신작 홍보로 작가는 물론 책을 낸 출판사, 그리고 더 크게는 일본 국익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됐다. 우선 시도 때도 없이, 공영 민방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홍보를 한 덕분에 그 장면은 도쿄발로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 덕분에 아시아는 물론 미국, 유럽에서도 무라카미 열풍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 세계에서 인세로 벌어들이는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일본문학을 세계에 알렸다는 홍보 면에서도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라는 얘기가 벌써 나오고 있다. 한국 출판계에서도 20억 수준의 선인세 계약이 됐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렇듯 일본은 어떤 한 목표가 정해지면 장기간 전략을 세워 그 목표를 향해 전 국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유는 단 하나 ‘국익’이다. 여기엔 라이벌도 경쟁사도 끼어들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 일본인의 보이지 않는 저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새삼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이벤트를 보면서 느낀 소감이다.

글 유재순 <제이피뉴스>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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