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00세마당에 선 어르신들, 치매 맞서 스스로 ‘존엄’을 지키다

송파구 100세마당 오픈 4개월…어르신 11명 목소리를 듣다
“치매 예방 위해서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 자신감 높아져

등록 : 2023-04-20 15:11 수정 : 2023-04-2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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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정서·사회적 교류 담은 생활습관’으로 치매 예방

“천천히 몸에 맞춰 가도 되니 정말 좋다”

싱가포르 공무원, ‘자국 적용’ 위해 방문

5월 금천 등 4곳에 새 ‘100세마당’ 선봬

2025년 시작되는 초고령사회에서는 어르신들에 대한 가장 큰 복지 중 하나가 ‘치매에 맞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13일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인지건강’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는 ‘100세마당’을 송파구 삼전동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 설치했다. 복지관을 찾는 어르신들은 100세마당이 생긴 뒤 스스로 치매에 맞서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지난 11일 100세마당에서 (앞줄 왼쪽부터) 김효남·김경자·나소남·홍옥자·정은숙·김재분·권은숙 어르신과 (둘째 줄 왼쪽부터) 김일진 어르신, 전미자 한국복지환경디자인연구소 이사장, 최의송·유완숙·김형진 어르신이 모여 100세마당 체험기를 나누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100세마당’은 현재와 같은 고령사회에서, ‘나의 존엄은 내가 지킨다’는 어르신들의 의지와 실천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송파구 삼전동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 설치된 100세마당을 찾은 지난 11일, 전미자 한국복지환경디자인연구소 이사장이 100세마당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100세마당은 서울시가 치매 문제 대응을 위해 조성해 지난해 12월13일 공개한 공간이다. 전 이사장은 100세마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총괄자문으로 활동했다.


기자는 지난해 12월 100세마당이 공개되던 날 현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때는 디자인 아이템에 초점을 맞춰 살펴봤다. 100세마당에 설치된 디자인 아이템이 치매에 맞서기 위해 서울시가 선도적으로 작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22년 12월23일치 커버스토리 ‘어르신 운동 돕는 ‘공공디자인’, 초고령사회의 적 치매에 맞서다’ 참조).

높게 쌓였던 송파노인종합복지관의 담벼락을 허문 뒤 만든 이 60평(200㎡) 공간에는 ‘손가락 운동’ ‘어깨 강화’ ‘바른 자세’ 등 14개 디자인 아이템이 갖춰져 있다. ‘신체강화’ ‘정서힐링’ ‘사회교류’의 기능을 골고루 갖춘 이 아이템들은 서울시가 치매 예방을 위해 2014년부터 추진해온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의 결과를 더욱 발전시킨 것들이다.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은 신체적·정서적·사회적 교류의 세 가지 생활습관을 통해 치매를 예방하고 일상생활 수행능력을 높이는 디자인이다.

하지만 4개월 만에 다시 찾은 100세마당에서 이용자인 어르신들에게 눈길이 갔다. 앞으로 3년 뒤인 2025년이면 우리나라는 ‘인구 20%가 노인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인구 5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100세마당에서 ‘바른자세 운동’을 하는 어르신.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할 것 같다. 하나는 100세마당과 같은 치매 예방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겠다는 어르신들의 의지다. 전 이사장이 말한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과연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서 100세마당을 매일 지켜보는 어르신들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 다니는 70대 이상 어르신 11명을 만났다. 80대가 4명, 70대가 7명이었다.

어르신들은 모두 치매에 대한 걱정이 컸다. 2010년부터 복지관을 찾고 있는 정은숙(81) 어르신은 “가끔은 무엇인가 마음으로는 기억이 나는데, 얼른 입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며 “행동도 늦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복지관에서 한국무용 수업을 듣는 김일진(79) 어르신도 “이제는 정말 오늘 들은 것을 내일 잊어버리는 상황이 됐다”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치매에 걸렸을 때 정말 걱정되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자녀들이었다. 홍옥자(75) 어르신은 “누구도 치매에 안 걸린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보다도 자식들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박성원 송파노인종합복지관 부장은 “현재 복지관 2층에는 ‘송파치매 주·야간보호센터’가 있는데 치매 어르신 34명이 이용 중”이라며 “복지관에 오시는 어르신들도 늘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앞으로의 내 운명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손가락 운동을 하는 어르신. 서울시 제공

사실 치매 예방을 위해서는 ‘정신적·육체적·사회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어르신들이 날마다 이 세 가지 활동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이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치매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예방하기도 어렵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초고령사회는 코앞인데 막상 어르신을 위한 공원의 운동기구 등을 보면 낙상 우려가 있는 등 난도가 높고, 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연스레 대화할 기회도 적어 어르신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시설물이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 부장은 “하지만 100세마당이 설치된 이후 송파노인종합복지관 이용 어르신들의 상황이 조금은 바뀐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어르신이 늘었다”는 것이다.

100세마당을 자주 이용한다는 나소남(78) 어르신은 “‘손가락 운동’ ‘어깨 강화’ ‘바른 자세’ 등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것저것 해보았다”며 “체력 등을 고려할 때 다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무릎 통증으로 연골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성인 체력단력실은 엄두도 못 낸다”는 김재분(71) 어르신은 “100세마당의 경우 천천히 가도 되니까 정말 좋다”고 말했다.

‘어깨근력강화운동’을 하는 어르신 모습. 서울시 제공

100세마당 이용방법 등을 안내하는 ‘인지건강리더’로 활동하는 김형진(82) 어르신은 “여럿이 함께 100세마당 윷놀이판에서 즐겁게 윷놀이도 한다”며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에는 치매가 안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홍옥자 어르신도 “집에 있으면 우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100세마당에서 운동하면 그런 마음이 사라진다”고 했다.

담을 허물고 만든 100세마당은 복지관 분위기도 환하게 바꿔놓았다. 아침에 복지관에 올 때마다 100세마당을 살핀다는 권은숙(75) 어르신은 “100세마당에 있는 화단에 지난 3월 팬지꽃을 심는 등 복지관이 잘 가꿔져서 들어오면서부터 환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담이 없으니 주민들과의 사회적 관계도 넓어졌다. 인지건강리더로 활동하는 김효남(73) 어르신은 “복지관 입구에 설치된 갤러리에는 현재 복지관 수강생들이 지은 시가 전시돼 있는데 복지관 회원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오며 가며 살펴본다”고 했다. 어르신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이 게시판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사진과 서예 등으로 전시물이 바뀌고 있다. 김 리더는 이어 “100세마당에서 오는 25일 복지관 회원들과 주민들이 참여하는 바자회가 열린다”며 “앞으로도 이런저런 사회적 활동이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 바자회에서도 원하는 지역주민들이 신청하면 100세마당에 마련된 무대에 20분간 설 수 있다”고 했다.

함께 사방치기 놀이를 하는 어르신들. 서울시 제공

전미자 이사장은 어르신들의 말씀을 경청한 뒤 “치매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이런 모습이 사회에 알려질수록 앞으로 어르신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욱 존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어르신의 노력’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노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 이사장은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르신들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즐거워하실 거라는 점”이라며 “하지만 이를 통해 젊은 사람들도 인지장애 등을 좀 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문을 연 지 불과 4개월여밖에 안 됐지만 100세마당에 대한 기대는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 5일 100세마당을 방문한 싱가포르 공무원들의 사례가 이를 대표한다.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인지건강리더 수료식’. 어르신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운동방법도 가르쳐주는 인지건강리더를 모두 어르신들이 직접 맡도록 함으로써 어르신들의 자존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서울시 제공

한국과 마찬가지로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에 높은 노인인구비율을 보이는 싱가포르는 그동안 서울시가 진행한 인지건강 디자인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2014년 이후 여러 차례 ‘도시관리과정 연수’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해 ‘신길4동 임대아파트 단지’ 등 인지건강 디자인이 적용된 사례를 살펴봤다. 그런데 올해는 100세마당을 방문한 것이다. 100세마당 주무부서인 서울시 디자인정책관 공공디자인사업팀에 따르면,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인구밀도, 고령화 추세, 가용부지 상황, 커뮤니티에 대한 문화적 배경 등 도시의 물리적·사회적 환경이 유럽과 아시아는 차이가 있어서 유럽 사례를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따라서 유사한 환경을 가진 서울시의 실증적 사례인 ‘인지건강 디자인 사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100세마당을 방문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100세마당 등 서울시의 인지건강 디자인을 참고해 싱가포르 북동부지방 ‘이오추캉’에서 주민참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현재 세부도면을 작성하는 단계라고 한다.

서울시도 송파구 100세마당의 성과를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선 오는 5월 서울 지역 4곳에서 새로운 100세마당이 선보일 예정이다. 송파구와 같이 노인종합복지관 등과 협업해 진행하는 기관형 3곳(노원노인종합복지관, 금천노인종합복지관, 마포시니어클럽)과 공원형 1곳(서초잠원근린공원)이 그것이다.

앞으로 서울시 곳곳에 퍼진 100세마당에서 ‘나의 존엄은 내가 지켜나가는’ 행복한 습관을 어르신 모두가 누리시길 기대해본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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